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4.29 폭동 30주년 되돌아 보며

2022-05-05 (목) 문태기 OC지국 국장
크게 작게
4.29 폭동 발생 전 1990-92년에는 사우스 센트럴 LA에서 리커 스토어 업주가 사망했다고 하면 80% 이상은 한인이었다. 심할 경우 1주에 한 명꼴로 한인 업주들이 강도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회부 일선 기자들은 하루 일과가 고달팠고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심한 피로로 코피를 흘렸던 동료도 있었다. 무장 강도의 위협 속에서 목숨을 내걸고 장사를 했던 한인 업주들의 긴장과 불안감은 더 했을 것이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1991년 3월 16일 토요일 오전 사우스 센트럴 LA에서 한인 업주 두순자 씨(당시 48세)가 15살이었던 라타샤 할린즈 양을 총으로 쏘아 숨지게 한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할린즈 양에게 심하게 맞은 두 씨가 얼굴을 돌리면서 걸어 나가려는 그녀에게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것이다. 두 씨가 소지했던 총은 한때 절도 당해 갱단에 의해서 방아쇠만 살짝 당겨도 나가게끔 개조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두 씨가 미 시민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 주요 미디어에서 ‘코리안 스토어 오너’라고 한인이라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할린즈 양에게 총을 쏘는 장면만 편집해 반복해서 보도 했다. 또 ‘증오’ 또는 ‘인종 차별’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없는 이 사건을 마치 ‘한흑 갈등’으로 몰아가면서 양 커뮤니티를 자극 시켰다.

이 사건은 1년 이상의 공판을 거쳐서 배심원단에서 2급 살인(우발적 살인) 평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이를 뒤집어 가벼운 ‘집행 유예’로 판결해 또 다시 흑인 커뮤니티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판결은 한동안 논란이 되면서 흑인커뮤니티의 강한 반발과 시위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관들에 대해서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흑인 커뮤니티의 분노가 폭발해 4.29 폭동이 일어나 사우스 센트럴 LA 한인 업소에 불똥이 튀었다.

폭동이 시작된 날 미 주요 방송들은 흑인들이 사우스 센트럴 LA에서 행인을 구타하고 가게에 불태우는 현장을 앞다투어 생중계 하면서 이를 지켜본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면서 폭도들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방송들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4.29폭동 당일 사우스 센트럴 LA 현장에는 폭도들에 의해서 가게가 불타고 물건들이 절도 당하고 있었지만 경찰차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고 사이렌 소리만 요란했다. 여러대의 경찰차들이 함께 움직이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물론 관할 경찰서 중의 하나인 77 스테이션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폭동 다음날 폭도들이 LA 한인타운으로 몰려 오면서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저녁에 한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 ‘원산 면옥에 폭도들이 있다’는 보도를 듣고 달려갔던 이재성 군이 숨지고 또 다른 한인이 총상을 입은 것이다.


그 당시 원산면옥 옥상에서 폭도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던 한인들이 폭도가 쳐들어오는 줄 알고 이재성 군이 탄 차량에 총격을 가한 것이다. 라디오 방송의 잘 못된 정보로 서로를 오인해서 발생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본보에서 특종으로 보도한 이 사건은 폭동으로 발생한 가슴아팠던 일이었다.

이같이 폭동으로 인해서 사우스 센트럴 LA 한인 업주들이 심각한 피해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인 리커스토어는 이웃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재건하면 안된다’, ‘불 탄 리커 스토어를 다시 오픈하려면 규제를 엄격하게 해야한다’ 등의 발언들이 미 정치인들 사이에 흘러 나왔다.

이민와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했던 한인들은 가게가 폭도에 의해서 불이타도 정부로부터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려고 해도 이를 방해 받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 폭동 피해를 입은 한인 업주를 도와 주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은근히 피해를 이들 탓으로 돌렸다.

그 당시 참으로 힘없었던 한인 업주들은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백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한인들이 ‘희생양’이 되어도 미 주류 사회에 제대로 강하게 어필한 한인 정치인도 없었다.

그 이후 한인커뮤니티는 너나할 것 없이 정치력 신장을 외쳐 지금은 남가주를 비롯해 미 전역에서 연방에서부터 로컬에 이르기까지 한인 정치인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한인들이 폭동 때 당했던 ‘설움’을 앞으로 또 다시 당하면 안된다. 한인 정치인들은 폭동 3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생계의 터전을 잃어버렸어도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던 한인 리커스토어 업주들의 뼈아팠던 심정을 가슴에 새겨 잊지 말았으면 한다.

<문태기 OC지국 국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