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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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함께 합니다’

2022-04-04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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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무차별 포격은 계속되고 있다. 민간인들이 매일같이 죽어나간다, 수 천 명씩. 4백만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생지옥이 된 살던 곳을 떠나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이웃나라로 피난길에 나서고 있다. 그 숫자는 시시각각 증가, 규모나, 스피드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엑소더스 행렬을 이루고 있다.’

‘국내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인도 650여만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그 대열에는 결국 남성들도 가담, 전체 피난민 수는 3배가 넘을 수도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침공 6주가 지난 시점에 외신들이 전하고 있는 현장 소식이다.


100여만의 시리아 난민이 몰려들면서 유럽은 더 이상 ‘칸트의 영구평화 유토피아’를 지향하던 유럽이 아니게 됐다. 유럽사회가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이것이 2015년의 상황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이미 400만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난민은 거의다가 어린아이와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머지않아 1,000만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전 유럽은 아연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무표정한 수치로만 발표되는 난민 현황. 그 가운데 난민들이 지닌 저마다의 사연들도 전해진다. 그 하나가 해외로, 해외로의 수백만 엑소더스 행렬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머니들’이야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루어지자 해외에서 입국한 우크라이나인은 최소 26만에 이른다. 그 대부분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해외에서 귀국한 자원입대 남성들이다. 이 자원 입국자들 중 20%는 어머니들이다.

외국 체류 중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그러자 집에 남겨둔 어린 자식들을, 또는 홀로 남겨진 늙은 부모를 찾아 어머니들이 수일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날라드는 포탄도 마다하고 불구덩이가 된 살던 곳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타임지는 전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가운데 문득 역사의 한 잔상이 어른거리는 느낌이다. 전란의 격동기. 그 한국 역사의 뒤안길에서 스러져간 안추원(安秋元)이란 사람이다.

1637년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수 백 만의 민초가 포로로 끌려간 그 난리 중에 그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중국 땅에 노예로 팔려갔다. 소년은 그러나 고향을 결코 잊지 않았다. 모진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탈출을 감행, 조선에 돌아왔다.


그러나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형제는 모두 사망했다. 그런 그에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안추원은 결국 조선에서의 삶을 포기한다. 그리고 노예로 살았던 그 청나라로 되돌아간다. 그러다가 도중에 국경에서 붙잡혀 그만 처형되고 만다.

지난 500여년의 세계 역사 속에 16번 세력의 대전환기가 있었고 그 중 12번은 전쟁으로 끝났다. 근대 이후 동아시아지역이 파워의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한반도도 거의 예외 없이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으로 얼룩진 구한말 망국의 슬픈 역사. 그리고 반세기 후의 6.25…. 그 고비마다 들려온 것은 역사의 조난자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애잔한 이야기들이다.

그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연암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고려보에 이르니 몹시 쓸쓸해 보인다. 앞서 정축년(병자호란 다음 해)에 잡혀온 사람들로 한 마을을 이루었다, 옛적에는 사신 일행들이 오면 여인들도 내외하지 않고 나와 반겼으나 이제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

박지원이 조선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 방문길에 고려보를 지나게 된 때는 병자호란 이후 100년도 지난 후로 세월이 쌓이면서 형해(形骸)화 되고 만 중국 땅의 조선인 디아스포라 정착지, 그 서글픈 모습을 담담히 그린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6.25전란의 격동기에 해외로 흩어진 한인들. 이산의 고통에서 출발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미주한인 사회가 메가시티를 방불케 하는 거대 커뮤니티로 발전했다. 그 축복의 근원은 어디서 찾아질까 하는 생각이 스쳐서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 끈질긴 생존능력. 틀리지 않은 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 만이었을까. 문득 한 단어가 떠올려진다. God’s Factor(하나님의 변수)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 대한민국이 공산군 침략을 받았다. 참혹한 전화(戰禍)에도 불구, 자유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은 한국인들. 그 한국에 사랑과 연대의 손을 내민 자유세계 시민들의 도움, God’s Factor로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이런 것들이 자유민주주의 경제대국 대한민국과 거대 미주한인사회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다시 눈을 우크라이나로 돌려본다. 러시아군의 끊이지 않는 공격으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그들이 절실히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제는 미주의 한인들도 나서서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함께 해줄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피플 파워’로 독재 권력의 무차별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인들. 그들을 돕는 것은 자유세계 시민의 기본 책무다. 그리고 더 더욱이 받은 축복을 흘려보낼 때 더 많은 축복이 찾아드는 것이 God’s Factor가 작동하는 원리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함께 합니다’- 전 한인 커뮤니티가 하나가 되어 미국 사회를 향해, 더 나가 세계를 향해 외칠 때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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