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제’란 단어는 누구에게나 두려움, 부끄러움, 공포의 느낌을 준다. 의대생 시절 낙제를 면하기 위해 재시험깨나 치렀다. 사회에 나와보니 낙제는 실패나 낙오의 뜻으로 많이 쓰였다. 실패가 성공의 열쇠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낙제나 실패를 할 당시엔 무척 힘들고 괴롭지만 이를 거울삼아 노력하면 성공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 또한 버릴 것이 없다. 낙제나 실패 없이 사는 삶은 세상 보는 눈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게 만들뿐이다.
직업 탓인지 낙제나 실패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관계가 매끄럽지 못해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낙제생들이었다. 그런 환자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 감사하라고 말하면 몇몇은 따귀를 때릴 듯 화를 낸다. 몇년 전 인생낙제 경험 후 우뚝 일어선 어느 환자의 얘기를 그의 딸로부터 들었다.
환자는 네 번 임신하고, 세 자식이 죽고, 이혼하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자식을 항상 염려하며 살아가는 여자노인이다. 첫 아들은 생후 몇 개월 내에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죽고, 둘째 아들은 조산아로 태어나 몇 주 못살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딴 여자한테 가버렸다. 남은 두 딸을 기르면서 그들이 어디가 아프면 심한 두려움 때문에 공황발작이 생겨 술과 진정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셋째인 딸도 45세에 유방암으로 죽었다. 어린 두 아들과 장성한 딸이 죽을 때마다 알코올 중독과 진정제 과다복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만큼 어머니들을 괴롭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슬픔, 원망, 분노, 절망, 무기력, 죄의식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가슴 속에 묻고 산다. 그럼에도 날이 지나면 서서히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자신들이 너무나 밉다. 노인 환자는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고 두 딸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후회와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정신과 약도 먹어보고 심리상담치료도 받았지만 효과는 적었다. 대개 독하지 않은 사람들이 정신병에 잘 걸린다.
최근 하나밖에 안 남은 막내딸이 암 진단을 받았다. 억울함과 회한, 자책을 가슴에 누르고 사는 어머니에게 나쁜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딸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틀림없이 어머니가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할 듯싶었다. 언젠간 알려야하기에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엄마, 나 가슴에 혹이 하나 생겼대. 수술 받고 방사선 치료하면 완치된대.”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딸의 손을 꽉 잡으며 “나 괜찮다. 우리 함께 기도하자” 하는 게 아닌가.
환자는 평생 죽음이란 덫에 걸려 살아왔고, 세상은 살 곳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목회자를 찾아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절대자와의 만남을 체험했다. 절대자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다 삶의 낙제생들이다. 환자는 목회자와의 상담을 통해 지나온 삶과 화해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분노, 우울을 넘어 이제 타협과 수용의 자세로 지구촌에서의 삶을 선물로 생각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우울증이 너무 깊으면 약과 심리치료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적상담이 필요하다.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여 심적 평안은 물론 영혼의 안정도 얻는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한두 번의 낙제나 실패는 생존 유전자가 도와주지만 자주 생기면 유전자의 능력을 소진시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다. 실패했을 때 실패를 감추면 그냥 실패로 남는다. 실패를 인정하고 수용하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실패를 했다 해도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기회 없이 지구촌을 떠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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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