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의미
2022-02-26 (토)
김미혜 / 한울 한국학교 교장)
조선 중기의 양반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며 9년 3개월 동안 매일 일기를 기록하였다. 그 기록인 ‘쇄미록(보물 제1096호)’은 ‘시경’에서 따온 말로서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을 뜻한다. 한 개인의 일기는 16세기 조선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쇄미록은 전쟁과 기근, 질병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탄생하였고 삶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울산의 김홍섭(90) 할아버지는 몇 년 전 1955년부터 쓴 일기 65권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한국 전쟁 참전 후 군 복무를 마친 뒤 농사일을 시작한 23세부터 쓴 영농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농사를 잘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기록이었는데 근대 농촌의 생생한 자료가 되었다. 하루하루 적다보니 30년, 60년이 되었다고 회고하는 할아버지는 매일 반복되는 습관의 힘을 깨닫게 한다.
나는 책을 가까이 두는 편인데 책을 읽다가 전에 읽은 책들의 내용을 다시 찾아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중에는 소장하고 있어서 쉽게 꺼내볼 수 있는 책도 있지만, 도서관이나 타인에게 빌린 책은 그럴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이후 책을 읽은 뒤 간단하게라도 메모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책에서 밑줄 그었던 부분들의 페이지 수와 글귀를 메모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관하기도 한다. 기록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때때로 이 과정을 생략하고 싶지만, 나중에 유용한 자료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미루지 않는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자료를 다 찾아볼 수 있는데 굳이 기록이 필요할까 싶지만, 책을 읽었던 당시의 생각과 느낌이 함께 있어서 검색해서 얻어내는 정보와는 차별화된 독특한 나만의 기록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육아일기를 기록했다. 가끔 과거의 기록을 찾아야 할 때 나는 그때의 노트를 열어서 확인하곤 한다. 이 노트는 단점도 있는데 한번 열면 쉽게 닫을 수 없어서 시간을 많이 쓰게 된다는 점이다.
엘르의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는 뇌졸중으로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전신마비의 상태에서도 글을 썼다. 사마천은 궁형의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기록을 남기며 살아있음을 증명한 사람들이 있다. 기록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쓰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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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 한울 한국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