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2022-02-24 (목)
임석훈 서울경제 논설위원
구소련 해체 후인 19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미국·영국·러시아와 구소련에 속했던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에 서명했다. 문서의 핵심은 소연방 3국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이 경제 지원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핵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만약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서명 당사국이 이를 협의해야 한다는 조항(6조)도 담겼다. 당시 핵탄두 1,700여 발, 핵미사일 170여 발을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었다.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에도 각각 1,400여 발, 800여 발의 핵탄두가 있었다. 세 나라는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로 반출해 폐기하고 핵미사일을 미국의 기술 지원 하에 해체하는 등 1996년 6월까지 비핵화를 완료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조약이나 협정처럼 법적 구속력이 없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왔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로 병합했을 때 미국 등 서방국들은 “심각한 각서 위반”이라며 반발했으나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 한 각서 위반에 대해 러시아를 비난할 수는 있어도 직접 무력 개입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2018년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각서의 종이 값만도 못하다”고 한탄했을 정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고 군 투입을 명령하자 우크라이나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6조에 따라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버티고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유엔 차원의 공식 지원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도자가 자국의 힘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한 채 열강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여 사태를 키운 우크라이나의 교훈을 새겨야 할 때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사력을 갖추고 가치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싸울 의지를 지녀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
<임석훈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