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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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2022-02-22 (화) 강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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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가 지나간 벌판에 서서
햇살만으로도 녹아내릴 사람이다 나는
한쪽 눈웃음으로도 무너져 내릴 뼈 없는 인형이다
벌판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곁에 왔다
걸어온 길은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갈 길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내 지키고 선 이 자리에서
여분으로 남겨진 사랑도 가슴에서 뽑아낸 뒤
흔적 없이 떠나고 싶을 뿐
얼어붙은 바람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다
그려 붙인 눈썹이 떨어져 나간 뒤
그대 뿜어낸 입김에 빈터로 남을 뿐
젖지 않고 떠난 자리에 남겨진 나뭇가지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다 다물었는지
끝내 숯이 된 눈으로 남는다 나는
그대 온기 담은 눈빛에도 녹아내릴
가까운 햇살이 두려운 사람이다

강영환 ‘눈사람’

눈사람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눈사람은 뒤돌아보면서 후회하지 않고, 걸어갈 앞날을 내다보며 미리 근심하지 않는다. 눈사람은 불멸의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소멸하는 법을 보여준다. 소멸해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법을 보여준다. 불멸의 시조새가 화석 속에 잠들어 있고, 소멸한 새의 후손이 아름답게 우짖는 것과 같다. 문명은 불멸을 꿈꾸고, 자연은 변화를 설파한다. 눈사람은 오늘 치 햇살에 녹는 만큼 오늘 치 사랑을 미루지 않는다. 눈사람은 가뭇없이 오롯하다. 고스란히 땅으로 스몄다가 남김없이 봄꽃으로 온다. 눈이 많이 온 해에 꽃이 많이 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꽃에서 눈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 향기가 다를 것이다. 반칠환 [시인]

<강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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