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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 세상

2022-02-22 (화)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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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가난했던 60여년전 고교시절에 시골출신 동급생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들 허름한 하숙집에 기거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은 ‘공짜’ 기차통학을 감행했다. 꼭두새벽에 역 근처 후미진 곳에 잠복해있다가 통근열차가 역을 출발한 후 느릿느릿 지나갈 때 우르르 몰려가 올라탄다고 했다. 객차 안에서 검표 역무원과 맞닥뜨려도 짐짓 눈감아준다고 했다.

하지만 성깔이 고약한 검표원을 만난 날은 죽을 맛이라고 했다. 인정사정없이 다음 역에서 쫓겨나 죽치고 있다가 오후수업을 들으려고 다음 기차에 뛰어오른다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한탄했다. 만약 무임승차 통학생들이 검표원 단속에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정부를 제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이라며 퇴학당했을 터이다.

그런데, 그게 적반하장인지 아닌지를 가릴 재판이 60여년이 흐른 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주 워싱턴주 대법원은 검표원이 승객에게 차표 구입여부를 묻는 것은 제4 수정헌법의 프라이버시 보호규정 위배라고 주장하는 한 무임승객의 소송 심리를 시작했다. 대법원이 할 일이 그리 없나 싶지만 나름 심각하다. 비슷한 송사가 타주에서도 있었다.


원고인 재커리 메레디스는 2018년 3월18일 보잉공장이 있는 에버렛에서 시애틀 외곽 쇼어라인까지 운행하는 ‘스위프트’에 무임승차 했다. 스위프트는 스노호미시 카운티 트랜짓의 급행 노선버스다. 정류장 지체시간을 줄이기 위해 승객들이 탑승 전에 요금을 자동수납기에 선불하고 앞 뒤 어느 문으로도 승하차 하도록 배려해 사실상 무임승차를 터놓은 상태이다.

그날 셰리프대원 3명이 스위프트에 올라 무임승차를 단속하며 흑인인 메레디스에게도 차표 구입여부를 물었다. 구입했다는 그의 말이 거짓임이 밝혀지자 대원들은 그를 구인해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메레디스가 신분증이 없다며 제시한 이름 역시 가짜로 드러나자 대원들은 지문을 조회했고, 그가 수배된 범죄 용의자임이 밝혀지자 허위진술 혐의로 체포했다.

소송을 제기한 그의 변호사는 메레디스가 무임승차했음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않은 경찰관들이 승차권 구입여부를 물은 것은 주 헌법과 연방 수정헌법의 프라이버시 보호조항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이를 방임할 경우 경찰은 유색인종을 비롯해 홈리스와 극빈층 등 대중교통수단 의존도가 높은 주민들을 계속 표적 삼아 단속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정부 변호사는 당시 검표한 셰리프대원들은 합법적으로 위임받은 단속권을 행사한 것이며 이는 수십년간 이어져온 관행이라고 주장하고 만약 법원이 메레디스에게 승소판결을 내릴 경우 무임승차 사태가 일어나 트랜짓이 거덜 난다고 지적했다. 메레디스 변호사는 소송의 요체는 요금부과의 적법성이 아니라 승객에 대한 무작위 심문의 적법성이라고 반박했다.

에버렛 지법 판사는 메레디스가 버스에 승차한 것은 단속경찰의 일상적 검표를 진즉 양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에게 패소판결을 내렸고 이어 항소법원도 이를 지지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라는 말이다. 메레디스 측은 그가 승소할 경우 트랜짓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것이지만 그보다는 헌법이 보장한 시민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판례가 있다. 지난해 메릴랜드주 대법원은 경전철에 무임승차 했다가 단속 당해 수배자 신분에 불법 무기소지 사실까지 발각돼 체포된 한 승객에게 제4 수정헌법을 들어 승소판결을 내리고 방면시켰다. 제4 수정헌법은 정부기관의 부당한 수색, 체포, 압수 등으로 국민의 신체, 재산 등에 관한 사생활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이 골자 내용이다.

안 그래도 적반하장 작태가 넘친다. 자동차를 추돌해놓고 피해자라고 우기고 편의점에서 일부러 넘어진 후 보상을 요구하기 일쑤다. 한국은 수정헌법이 없는데도 대선을 코앞에 두고 가히 적반하장 세상이 됐다. 방귀뀌고 성내는 자가 너무 많아 구린내가 진동해도 모른 체 한다. 하지만 옛날 공짜로 기차통학을 했던 친구들이 세상 좋아졌다고 말하진 않을 것 같다.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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