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송산책] 오리지널을 능가한 명곡 시리즈 Moon River (달빛이 흐르는 강-노래: Andy Williams) (1)
2022-02-04 (금)
정태문
“1마일 보다 훨씬 넓고 달빛이 조용히 흐르는 강. 언젠가 멋지게 저 강을 건너갈 거예요. 오! 꿈을 만드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 하지만 당신이 어디로 가던간에 난 당신을 따라갈 겁니다. 세상을 보기 위해 떠나는 두 방랑자. 그곳엔 세상에서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강의 굽은 곳 근처에서 기다리는 무지개의 끝을 우린 같은 목적으로 좇고있어요. 나의 절친한 친구. 달빛이 찬란히 흐르는 강과 그리고 나.”
이 노래는 1961년에 상영된 ‘티파니에서 아침’이란 영화에 삽입된 노래이다.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오드리 햅번이 직접 불러 처음 소개되었다. 허나 그녀가 노래하기까지는 숱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영화 제작자는 영화 음악의 거장 Henry Mancini에게 영화에 삽입될 음악을 의뢰했다. 작곡자는 즉시 멜로디를 만들어 작사가인 Johnny Mercer에게 보내 노래 가사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하여 노래가 완성된 후 작곡자는 누구에게 이 노래를 불리우게 할까 생각하다가 오드리 헵번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번에 거절했다. “난 배우이지 가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난 노래엔 재능이 거의 없어요.” 그럼에도 작곡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음역에 맞춰 높은 톤의 멜로디를 없애고 낮은 톤의 음역으로 수정하여 계속 그녀를 설득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피나는 연습을 하여 레코딩을 마쳤다. 작곡자도 노래를 부른 오드리 햅번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오드리 햅번이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장면으로 마무리 되었다.
영화가 완성되고 영화 상영 전에 Paramount Studio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회가 끝난 후 스튜디오 총 책임자인 Martin Rackin은 큰 소리로 말했다. “영화는 정말 멋지게 만들었다. 단 오드리 햅번의 노래 장면은 삭제해야 한다.” 그러자 오드리 햅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눈에 흙이 들어 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진행되자 할 수 없이 스튜디오 책임자가 양보하여 이 노래는 살아났다. 그 다음 해에 시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노래는 주제가상을 받고 또한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최우수 레코드 상을 획득하여 겹 경사를 이루었다. 이 노래는 미국 필름 연구사에서 발표한 역대 베스트 영화 음악 리스트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하여 오드리 햅번 고집의 승리를 뒷받침해 주었다. 참고로 역대 베스트 Top 3 곡은 ‘오즈의 마법사’의 Over The Rainbow, ‘카사 브랑카’의 As Time Goes By, ‘사랑은 빗줄기를 타고’에 삽입된 Singing In The Rain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은 Truman Capone의 원작 소설을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판권을 사서 여주인공으로 섹시 아이콘인 마릴린 몬로를 점 찍었으나 여주인공이 몸을 파는 밤의 여자 역할이라 출연 후 평판이 두려워 포기하자 영화사는 다시 킴 노박과 셔리 맥크레인에게 제의했으나 모두 고사했다. 궁여지책으로 밤의 여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드리 햅번에게 역할이 주어졌다. 허나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녀는 1953년에 출연한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공주의 이미지가 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혀 있는데 그런 깨끗하고 청순한 용모의 소유자에게 거리의 여자 역할은 당치도 않은 캐스팅이라고 모두가 반대했다. 설상가상으로 남우 주인공으로 스티브 맥킨에게 교섭이 갔지만 그의 스케줄이 중복되어 이마저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 급기야는 조지 페퍼드에게 그 역할이 주어졌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 영화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결국 영화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어 250만불을 투자하고 영화는 촬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나고 박스 오피스의 상영 결과는 예상을 훨씬 넘는 대박이었다. 투자 금액의 6배에 해당하는 1천400만불을 달성했다.
오드리 햅번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2차 세계대전때 영국이 독일의 침공으로 중립국인 네델란드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가족이 모두 건너갔다. 허나 잘못 판단이었다. 독일의 식품 공급 통제로 네델란드는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오드리 햅번은 쓰레기를 뒤져 배고픔을 해결해야 했다. 후에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땐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했다.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발견할 때 그건 행복이었다.” 당시 배고픔은 영양실조로 이어졌으며 그 후유증으로 그녀는 평생 마른 체중을 가져야 했다. 그 와중에도 좋아하는 발레 연습은 열심히 했으며 발레는 이후 그녀가 배우로 성장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몸이 너무 야위어 발레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배우란 직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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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