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운동 삼아 늘 나가는 길에 하얀색 나무 의자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누가 앉아있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앉아있기에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돌 쌓은 곳을 넘어 물가 가까이 있는 곳이니, 햇빛 바라기하며 앉으러 가기에는 넘어야할 장애물이 많다.
그러기를 한 달 넘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의자를 보면서,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오며가며 눈에 띄는 그 의자를 이제는 이름까지 지어주게 되었다. “생각하는 의자”
그 의자에 앉으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은 이름이다. 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자연을 상상해본다. 햇빛에 반짝이며 내려오는 강물, 종류도 다양한 물새들이 내려앉았다 차오르는 모습들, 봄기운 가득해지면 터뜨리려고 꽃망울에 힘을 모으고 있는 꽃대들도 보일 것이다. 어느 시간에 바닷물이 들어와 강물이 차오르는지, 어느 시간에 바닷물은 빠지고 강둑이 드러나는지 그 의자에 앉아있으면 다 보일 것이다. 의자에 앉아 그런 자연의 모습을 가만히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성급하게 살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어느 인디언 부족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서있다고 한다. 말의 속도에 몸은 따라갔지만, 영혼은 미처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거란다.
이제는 나도 마치 인디언 부족인 양, 그 생각하는 의자 근처에 오면 잠시 숨을 멈추고 돌아본다.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사선으로 비껴들어오던 햇빛도 서서히 일어나 머리 위로 오고 있다는 것도 느끼며, 바쁘게 사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보지 못했던 것은 자연의 모습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위로의 말이 필요했건만, 바쁘다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다. 바쁘다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사람을 대했을 수도 있었겠다. 마음을 담아 말하기보다는 사무적으로 말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
사랑은 천천히 느린 속도여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이제 부모가 시간이 많아 자식과 얘기하고 싶은데, 자식들이 바빠져 얘기할 새가 없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 바쁘게 살다 전화도 자주 못 드렸다 싶을 때, 아버지 그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천천히, 또 찬찬히 살아야 사랑도 한다. 가끔은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내 영혼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봐야겠다.
<
송일란 / 교회 사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