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본 뮤지컬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온종일 설레임으로 들뜨게 했던 ‘투나잇’, 맘보 댄스를 배우고 싶게 만들었던 ‘아메리카’는 추억을 소환시키는 장면들로 간직돼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레오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음악에 스티븐 손드하임이 노랫말을 쓰고 제롬 로빈스의 안무가 더해진 뮤지컬 고전이다. 195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지금까지도 전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1961년 당대 최고의 배우 나탈리 우드를 여주인공 ‘마리아’로 영화화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첫 뮤지컬 영화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이유를 밝혔다. 언제나 의미 있는 주제인 사랑과 현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분열을 담은 뮤지컬 클래식에 새로움을 덧입혀 새로운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다. 그렇게 스필버그 감독의 리메이크는 그의 전작 ‘뮌헨’과 ‘링컨’을 집필한 토니 쿠슈너 작가가 합세하면서 변화된 세상에 맞는 러브 스토리로 진화했다.
지난해 11월 영화 개봉 직전 타계한 ‘브로드웨이의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이 20대 후반에 쓴 노랫말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6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원작의 아니타 역할로 인기를 끌었던 리타 모레노가 91세의 할머니가 되어 갱생하려는 청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등장할 뿐이다. 그럼에도 두 갱단의 세력 다툼으로 비극을 맞는 토니와 마리아의 애절한 사랑보다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편견 없는 사랑의 서사에 무게의 추가 기운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 들어 스필버그 감독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 뮤지컬은 할리웃 거장의 감각적인 연출이 가미되면서 초반부 흡인력이 엄청나다. 링컨센터 완공을 앞두고 철거 작업이 한창인 뉴욕의 슬럼가를 따라가는 첫 장면부터 압도적인 비주얼은 극장에서 봐야할 이유를 깨닫게 해준다.
뉴욕이란 도시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가능한 실제 배경인 뉴욕의 거리에서 촬영하기를 고집했다. 두 라이벌 갱단들이 견뎌낸 시대적 맥락과 그 시절의 전경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쿨’ 노래를 흐르는 브룩클린의 버스 터미널 피어 공원, 두 주인공이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세인트 토마스 가톨릭 학교 체육관, 둘의 만남을 이어가게 한 72가 지하철역, 갱단들이 활보하는 워싱턴 하이츠와 할렘 거리 등이 등장한다.
희망을 노래하는 격동적인 춤이 압권인 ‘아메리카’는 19세기 푸에르토리코 출신이 다수 거주했던 샌후안 힐, 지금의 뉴욕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 60가에서 72가로 이어지는 링컨 스퀘어가 촬영지이다. 샌 후안 힐은 원래 미국과 스페인 전쟁 때 미국에 점령당했던 쿠바 남동부 산티아고 드 쿠바 인근의 언덕이다. 1898년 루즈벨트 대령이 기병대를 이끌고 치른 전투에서 승전보를 안게 해준 지역의 명칭을 뉴욕으로 건너온 푸에르토리코인들이 그대로 차용했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푸에르토리코는 이 전쟁 이후 미국이 통치하게 됐고 1952년 미국의 자치령으로 바뀌었다. 저렴한 인건비와 법인세를 내세워 미국 기업을 대거 유치하면서 미국의 공장 역할을 하는 번성기를 누렸지만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로 인해 경제 파산에 이르렀다.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본토와의 왕래가 자유롭지만 괌, 아메리칸 사모아 등처럼 미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권은 없다.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은 국가 지위에 관해 1967년부터 5번이나 독립할 것인가, 자치령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주로 편입할 것인가를 두고 수 차례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미국 자치령으로 남기를 희망하다가 2012년과 2017년 선거에서는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푸에르토리코이기에 미국 의회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스필버그 감독의 리메이크 작에는 스패니시 대사에 영어 자막이 나오지 않는데 영어와 스패니시가 공존하는 뉴욕의 이민자 삶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지난 9일 열렸던 제79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독’ HBO시리즈 ‘석세션’과 함께 3관왕에 올랐다. 최다 수상작이 된 2편의 영화와 1편의 TV 시리즈는 ‘가족애’를 공통 키워드로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각기 다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위험한 사랑, 누군가를 보호하고자 파괴하는 뒤틀린 사랑, 손에 쥐기 위해 협력하는 욕망에 휘둘린 사랑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쏟아져 나올 영화와 TV 시리즈에서는 또 어떤 사랑을 지켜보게 될까. 2년 넘게 이어진 팬데믹으로 피폐해진 영혼에게 키케로처럼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는 사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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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