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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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선물들

2021-10-27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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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자서전 ‘약속의 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일을 시작하려는데 벽난로 선반에 놓인 커다란 여행 가방이 눈에 띄었다. 걸쇠를 벗기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한쪽에는 대리석 받침대 위에 사막풍경을 묘사한 황금 미니어처 조각과 온도변화를 동력원으로 이용하는 유리시계가 들어있었다. 반대쪽에는 벨벳상자 안에 수십만 달러는 나갈 듯한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자전거 체인 절반 길이의 목걸이가 들어있었고, 옆에는 목걸이와 짝을 이루는 반지와 귀고리가 놓여있었다. 나는 벤과 데니스를 올려다보았다. 데니스가 말했다. “여사님을 위한 작은 선물 같습니다.” 그는 다른 대표단의 숙소에도 상자 안에 값비싼 시계가 들어있더라고 말했다. “선물 금지규정을 사우디 인들에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나 보군요.” 묵직한 보석을 들어올리며, 사우디 왕국을 공식 방문한 외국 정상을 위해 이런 선물이 몇 번이나 은근슬쩍 놓여있었을지 생각했다. 나는 목걸이를 내려놓고 가방을 닫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일합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선물세례를 받았다. 사우디가 트럼프와 수행관리들에게 베푼 선물은 무려 82가지나 됐는데, 이중 가장 비싼 것은 백호와 치타 모피의류 3벌, 3개의 장검, 상아손잡이가 달린 단검 등이었다. 오바마와는 달리 이 선물들을 모두 챙겨온 트럼프는 3년8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외국선물 목록에 신고하지 않았고, 퇴임 전날인 올해 1월19일에야 연방총무청(GSA)에 이관했다. 실세였던 사위 재러드 쿠쉬너가 받은 2개의 긴 칼과 1개의 단검도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으며, 그는 백악관을 떠난 후 지난 2월에야 이 검들과 다른 3개의 선물에 대해 4만7,920달러를 지불했다.


황당한 사실은 트럼프가 받았던 모피는 염색된 가짜였고, 단검의 상아손잡이는 여러 동물의 뼈가 섞인 모조품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는 호랑이 털과 상아로 제조된 선물을 받은 것은 멸종위기종 보호법 위반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자 어류·야생동물관리국(USFWS)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사우디 정부가 이를 알았는지, 아니면 공급업체가 속인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상호간에 국제적 망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한편 트럼프 행정부의 관리들이 외국선물과 관련한 규정을 위반한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베트남에서 금화와 도자기 그릇을 받은 기록이 있지만 선물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볼턴은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건넸다는 5,800달러 상당의 위스키와 또 다른 국무부 관료에게 선물한 22캐럿 금화도 사라졌다. 폼페이오는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아내 캐런 펜스는 싱가포르 총리에게서 받은 2개의 금박 명함지갑에 대해 규정된 값을 지불하지 않고 가져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국무부 감찰반은 지난 1월 트럼프 국무부의 직원들이 떠날 때 금고에 보관돼있던 ‘선물가방’을 챙겨간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 중이다. 이 기프트백은 2020년 예정됐다가 팬데믹 때문에 취소된 G7정상회담의 수반들을 위해 준비했던 것으로 가죽가방, 백납쟁반, 대리석 장신구박스 등 수천달러 상당의 선물 수십가지가 들어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트럼프행정부 직원들이 받았으나 신고하지 않고 사라진 선물이 2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소동은 굉장히 이례적이고 수치스런 일로 여겨지고 있다. 오바마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가족 및 관료, 내각에서 보고되지 않은 선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250년전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정부 관료들이 유럽 귀족들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고 그들의 회유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헌법에 외국인으로부터 값나가는 선물 받는 일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1966년 의회는 미정부 고위관리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의 가치(현재 415달러)를 규정한 법을 통과시켰고, 행정부는 매년 해외에서 받은 선물 목록과 감정가격을 공개하도록 했다. 외국에서 415달러 이상의 선물을 받을 경우, 이를 정부에 넘기거나 그에 상당하는 돈을 낸 후 소유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 해외방문에서 받는 선물은 수만개가 넘는다. 재선하여 8년 재임하면 그 두 배가 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의 경우 9만4,000여 개를 받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 선물들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우디 왕가는 오바마와 트럼프뿐 아니라 부시 대통령 부인 로라 여사에게도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 팔찌, 귀걸이, 반지 세트를 안겼는데, 감정가가 9만5,500달러에 달했던 이 보석세트는 국고에 귀속됐다. 이렇게 국고로 귀속된 선물들은 훗날 세워지는 대통령도서관으로 옮겨져 일반에 전시된다.

백호모피 사건을 비롯한 각종 선물 착복 및 실종사건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총체적으로 얼마나 탐욕스럽고 뻔뻔하며 비도덕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범죄윤리 전문변호사는 뉴욕타임스에서 “이게 무관심인지, 칠칠치 못함인지, 아니면 날강도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나 법과 행정절차에 대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라고 일갈했다.

안하무인에 후안무치, 이런 일당이 또 한 번 집권을 꿈꾸는 모양이다. 나라가 안팍으로 또 다시 거덜나지 않으려면 바이든 정부는 정신 바짝 차려야할 것이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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