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 닥터 질 여사
2021-10-20 (수)
차재우 한반도 문화재단 대표
며칠 전 이름 모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처음엔 알 수 없는 번호로 들어왔기에 받지를 않았더니 이내 번호가 뜨길래 받았다. 다짜고짜 “영부인 닥터 질(Dr. Jill) 여사가 처음 버지니아에 공개 연설하는데 오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투표권도 없는 내게 왜 이런 전화가 왔을까하고.
이내 2017년인가 한국일보 워싱턴 주관으로 체비 체이스에서 하려고 했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부인인 메리 토드 링컨 여사 초상화 전시회가 떠올랐다. 당시 전시회는 오토 웜비어의 죽음으로 비등한 미국민의 대북 인식이 악화되어 개최하지 못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미국을 강타하던 2020년 3월초 마침내 뉴욕 맨해튼의 한인 이민사박물관에서 뉴욕 한국일보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개최가 성사되었다. 아마도 이 전시가 백악관에도 알려져 경기도 용인 촌놈인 내게까지 초청이 온 것으로 짐작되었다.
행사가 열린 곳은 버지니아 주 남쪽 헨리코란 곳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굉장히 소규모로 진행된 행사였기에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앞 옆을 한참을 보아도 아시안 남성은 나 하나였다. 키가 작은 편이라 경호원 같은 백인여성이 길을 열어준 덕에 2미터 앞에서 미국의 영부인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키가 큰 영부인은 항상 자신을 퍼스트레이디가 아닌 닥터 질로 호칭받기를 원한다고 알고 있기에 유심히 그 내공이 궁금했다. 목소리는 의외로 날카로운 칼 같았고 연설 내내 제스처 또한 활발했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가 않게 다가왔다. 아마도 부드러운 미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내 허다한 인생들이 코로나란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유명을 달리한 미 국민의 슬픔을 꾹 참고 신임 바이든 대통령 내외가 취임식 전야에 가졌던 링컨기념관 앞에서의 ‘먼저 떠나간 자를 위한 묵념’의 시간이 떠올랐다.
닥터 질 여사는 1972년 사랑하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은 바이든 당시 델라웨어 연방 하원의원과 재혼하여 심각한 교통사고 후유증을 앓은 장남 보와 차남 헌터를 성심으로 키워낸 분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소지한 분이다. 이 영부인이 어떻게 이 두 자녀와 자신과 바이든 대통령 사이에 태어난 딸 애쉴리를 키워냈는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세 자녀를 올곧이 양육하면서 자신의 신념인 교육헌신을 관철했는지가 늘 관심대상이었다. 늘 출근길의 아내를 데려다줄 때 지나는 노던 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의 영문학 교수로 영부인이 되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는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자유와 평등이 국호인 미합중국의 영부인으로 충분히 자격이 있는 분으로 생각된다.
이날은 버지니아 주지사에 출마한 테리 맥컬리프 주지사를 응원한 자리였음을 집회 중간 쯤 가서야 알게 되었다.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 무렵 영부인을 비롯한 주요 참석자들이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신나게 댄스를 추는 장면이었다. 참 훈훈하게 다가온 가을밤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조지 메이슨 도서관 앞엔 그림 한 점이 수려한 나무 앞에 그려져 있는데 링컨기념관과 제퍼슨 기념탑이 호수에 투영된 모습이다. 체코슬로바키아 혈통을 갖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작가인 앤디 워홀을 공부하다 느끼곤 한 것인데 미 국민들은 반추(Reflection)랄까 과거를 돌아보아 현재에 적용해서 새 길을 찾는 데에 특화된 국민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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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우 한반도 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