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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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연습이야

2021-09-20 (월) 이수진 /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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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익숙한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화살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리듯 미국으로 던져진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바로 실패라는 과녁이었다.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이 무엇인지, 선생님의 이름은 무엇인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나의 눈과 입과 귀는 한꺼번에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매일 낙담하고 좌절해야 했다.

7학년 여름, 그날도 나는 여전히 실패 중이었다. 문학 수업에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어렵고 긴 이 소설에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코피가 흘러 교실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놀란 선생님이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 돌돌 말은 휴지로 코를 막아주는데, 일 년 내내 눌러오던 설움과 울분이 비집고 나왔다. “친구들이 나를 자꾸 놀려요. 나는 이렇게 긴 책을 영어로 읽을 수가 없어요. 한 문장을 쓰는 것도 불가능해요. 배도 고프고 집이 그리워요. 저는 못 하겠어요. 이렇게 실패하는데 무슨 의미예요.”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시끄러운 내 불평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의미가 있지, 연습이라면. 이 과제를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해보면 어떨까?” 그날 밤, 나는 다 낡아버린 단어 사전을 뒤적이며 책을 겨우 정독하고, 주인공들의 모습과 감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큰 도화지 두 장에 글이 아닌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선생님은 소리를 크게 한번 지르고 교실 중앙에 내 그림을 걸었고, 그 다음해부터 나는 미국 아이들에게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상위권 반에서 당당히 영어 수업을 들었다. 새롭고 더 좁아진 실패의 과녁을 마주하며.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진부한 새해 다짐을 할 때도, 내일 시험을 위해 밤을 새울 때에도, 처음 배우는 악기를 손에 잡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리의 자아가 속삭인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예외 없이 실패는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삶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매일같이 찾아오는 실패의 순간들이, 앞으로 더 많이 다가올 찬란하고 어려운 과녁들을 향해 용기 있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연습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수진 /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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