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와 민주주의의 함수관계

2021-08-30 (월) E.J. 디온 주니어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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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우리에게 유용한가?

아마도 ‘우문’이라는 지적을 받기 십상인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폭력과 무관용, 혐오를 조장하는 믿음체계와 달리 사랑, 온정과 정의를 촉진하는 신앙으로 간주한다.

근년 들어 기독교 우파에 속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기독교적인 가치를 밀어낸 도널드 트럼프를 전폭적으로 끌어안으면서 미국은 종교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에 휩싸였다. 보수적인 종교관과 인종주의 및 토착주의(nativism)를 한데 버무린 트럼프의 조합은 숱한 신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을 신앙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냈다.


종교 옹호론자들은 옛 찬송가에 나오듯 빈민과 소외된 자, 홈리스와 이방인들에게 자비롭고 정의로운 행동을 취하게끔 만드는 ‘기적 같은’ 신앙의 힘을 강조한다. 반대로 비판론자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절대적 확신에 근거한 일체의 불관용과 핍박의 폐해를 지적한다.

필자가 존경하는 시카고 대교구장 블라세 수피치 추기경은 교회를 이탈하는 신도들의 비율이 치솟는 상황을 우려한다. 프랜치스코 교황의 강력한 지지자인 수피치 추기경은 문화전쟁에 뿌리를 둔 가톨릭교를 거부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성찬식 참여를 막으려는 그릇된 시도에 반대한다.

수피치 추기경은 지난달 자신이 속한 시카고 대교구의 주보인 시카고 카톨릭에 ‘종교에서 떨어져나가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듯 많은 젊은이들이 종교와 정치 모두에 등을 돌린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는 종교가 민주주의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일러주는 단서를 찾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탁월한 통찰력으로 19세기 미국사를 설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힘을 빌렸다. 수피치 추기경의 논지는 “민주적 국가에서 신앙이 극단주의를 완화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이다. 이는 필자가 오랫동안 공유해왔으나 근래 들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관점이다.

“종교는 숭배를 인간의 역사(human project)가 아니라 오직 신(God)에 대한 숭배로 정확히 규정했다”는 수피치 추기경의 견해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여러 해 전, 신학자인 H. 리처드 니버도 “급진적 유일신론은 독자적 존재의 원칙에 못 미치는 모든 절대적인 것을 권좌에서 끌어내린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수피치 추기경의 견해처럼 이들 모두가 결점을 지닌 인간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못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정치 지도자의 신격화에 저항하고, 특정 이념을 오류가 없는 행동지침으로 떠받드는 데 반대한다는 얘기다. 수피치 추기경은 믿는 자들은 정치를 ‘우상처럼’ 대하는 태도에 저항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우리가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힘을 숭배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드 토크빌의 말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절대적인 기준을 수립하면 현 시점에 꼭 필요한 미덕인 겸손을 장려하게 된다. 이런 기준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상대방의 견해가 옳고,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피치 추기경에 따르면 앞서 말한 겸손은 우리에게 사고의 전환과 용서를 촉구한다. 게다가 종교는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고통을 분담하며, 서로에게 의지하는 편안함을 경험하게 만든다”고 수피치 추기경은 강조한다.


종교에 관한 수피치 추기경의 매력적인 비전은 특정한 신앙심의 형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강경하고 때론 권위주의적인 우파에게 종교는 민주주의의 영원한 친구도 아니고, 긍정적인 사회적 힘도 아니다.

수피치 추기경의 에세이가 나온 이후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거둔 승리는 그가 전도하는 관용과 개방성의 정반대편에 특정 형태의 강력한 유신론이 버티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시카고 대교구장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진보적 버전으로 절대주의와 결별하고 판이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함께 생활하는데 필요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며 국가권력을 이용해 특정한 종교의 승인된 교리를 강요하는데 저항해야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수피치 추기경이 1960년대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두둔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과 뜻을 함께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오랜 저항 끝에 진보주의가 장려하는 초개인주의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유지한 채 진보주의가 제공한 많은 은혜로운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이같은 진보적인 접근법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한껏 힘을 키우고 있다. 가톨릭의 경우, 상당한 숫자의 지식인들이 계몽시대 이전의 사고를 포용하려는 제2차 바티칸 공화의 정신에 등을 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평신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세속주의 세력과 다원주의의 위협을 받는 주체성의 한 형태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트럼프를 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피치 추기경의 증언은 종교가 도전의 시기에 끌어낸 영적·지적 자원을 민주주의에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비판론자들에게 던지는 기억의 환기물이다. 그러나 종교와 민주주의 사이의 고리는 결코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은 사회전반에서, 또한 그들 스스로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 휴가로 인한 대체 칼럼으로 E.J. 디온 주니어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의 칼럼을 게제합니다. E.J. 디온 주니어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싱크탱크 중 하나인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위원과 조지타운 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습니디.

<E.J. 디온 주니어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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