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여름 밤의 허망한 꿈’이 될지도…

2021-08-09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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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이 두 쪽으로 나뉘었다. 북한 김여정의 한마디에. 더불어민주당 등 범여권 국회의원 70여명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7월 27일이었나. 북한이 일방적으로 끊었던 남북 간 통신선이 13개월 만에 복원된 것이. 그러자 당장 야단이 났다. 남북교류가 회복된다,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다 등등의 기대에 잔득 부풀어.

그 와중에 김여정의 특별담화라는 것이 나왔다.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 군사훈련 취소를 요구하면서 ‘적대적인 전쟁연습을 벌여놓는가 아니면 큰 용단을 내리겠는가에 대해 예의주시해볼 것’이라고 위협을 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대북전단을 문제로 삼아 통신선을 일방적으로 차단했다. 그도 모자라 남북공동사무소를 멋대로 폭파했다. 그리고는 통신선 복원과 함께 극히 오만한 자세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왔으니.

가관인 것은 문재인 정부의 대응 자세다. 김여정의 하명의 한 마디 말에 정부와 여권 전체가 그만 혼란에 빠져 든 것이다. 통일부와 국방부는 각기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국가정보원의 수장이란 사람은 마치 북한을 대변하듯 김여정의 하명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 모양새가 그렇다. 통일원장관, 국가정보원장,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북한의 지시를 아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할까.

더 황당한 것은 뒤에 숨어 애매한 말만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다. 정부 부처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여권도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란 사람이 국방장관을 불러 한 말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 신중하게 협의하라”는 것이었다.

생색나는 일, 지지율이 올라 갈 일이면 반드시 끼어든다. 그것도 아주 재빨리. 그리고 예쁜 말을 한다. 욕먹을 일. 지지율이 떨어질 일이면 근처에 가는 것조차 사린다.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책임회피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오른 문대통령이 지난 4년여 동안 보여 온 행태다. 그러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라’는 문 대통령의 말은 그렇지만 단순한 책임회피성의 발언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두루뭉술하게 말함으로써 한미연합훈련 실시는 대통령 지시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북측에 보내려는 계산이 숨겨져 있는 등 나름 고뇌의 흔적이 배어 있다.

그 ‘여러 가지 고려 사항’발언에는 동시에 한 가지 주문도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화려한 남북정상회담 이벤트를 펼칠 계획이다. 그 계획에 차질이 없게 하라는 당부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이.


문 정권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또 한 차례 김정은과의 평화 쇼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는 교황 방북설. 탁현민 비서관의 뉴욕방문. 남북 협상에 관여했던 정부관계자들의 수상쩍은 동선. 관련해 나오고 있는 유력 시나리오는 내년 대선 한 달을 앞두고 열리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네 번째 남북정상회담은 과연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그 평화 쇼는 대선의 표심을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는 2018년에 비하면 상당히 낮다. 물론 한국의 좌파연합은 정상회담노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도성향의 한국인들은 상당히 회의적인 입장이다. 우파는 문 대통령을 종북성향으로 의심하고 있다.” 내셔널 인터레스트지의 지적이다.

세 번씩이나 이루어진 남북, 미북 정상회담. 그러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네 번째 이루어지는 평화 쇼. 과연 감동이 있을까 하는 분석인 것이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대하는 자세는 한국과 크게 다르다. 3년 전에도 그랬지만 김정은의 관심은 남한이 아닌 미국에 있다. 남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트는 중간 들러리 정도로 본다. 문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나름 ‘자율적 외교 공간’을 확보했다고 해도 모든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음을 김정은은 알고 있다.

“초강대국과 중견국가의 관계에서 안보 리스크가 낮은 때에는 중견국가의 자주 외교의 공간은 다소 넓어진다. 안보 리스크가 높을 때는 그 공간이 극도로 좁아진다. 냉전시대에 보아왔던 것처럼 굳건한 동맹결속 형태 등으로.” 호주의 싱크탱크 로우이의 지적이다.

미국은 중국과 전 방위적 대립상황을 맞고 있다. 안보 리스크는 계속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정황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에 어떤 접근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 차기 정부를 기대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가만히 있다가 퇴장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문제 전문가 로버트 켈리의 진단이다.

이 점을 북한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려지는 전망은 문 정권의 또 한 차례의 남북 평화 쇼의 꿈은 ‘한 여름 밤의 허망한 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김정은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고 퍼주고 또 퍼줄 때 그 갈라 쇼의 염원은 이루어 질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인가 예사롭지 않은 소문이 번지고 있다. 은밀한 남북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논설위원>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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