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의 문제가 생명만큼 중요할 때가 있다. 힘없는 약자가 합당한 이유 없이 품위를 훼손당해 했을 때, 그래서 앞길이 깜깜할 때, 생명을 걸고 항거하거나 보복에 나서기도 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품위를 훼손당하여 소외감을 느낄 때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신속히 나서서 도와주어야 한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훼손된 품위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를 놀라게 하는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아비샤이 마갈렛의 ‘품위있는 사회’ 중에서)
UCLA 의과대학 강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학생이 일어나 교수에게 아주 평범한 질문을 했다. 교수는 그 학생을 빤히 쳐다보면서 “정말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군, 그것도 모르면서 의과대학에 어떻게 들어왔나? ”라고 품위의 모욕을 줬다.
질문을 한 학생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들지도 못했다. 그 순간이다.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친구가 교수를 향해 오른 손을 높이 들었다. 교수는 그 친구를 알아보고, 무슨 대답을 하려나 기대에 찬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학생은 말했다. “교수님, 저희 중 바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지식이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지식을 쌓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앉아있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조금 전의 그 친구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말 한마디로 인해 그 친구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학생의 말대로 교수는 강의를 계속 하기에 앞서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자기의 잘못된 권위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던 그 학생의 도덕적 용기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일부 유대인들은 물 한 컵을 배급 받을 때, 그것을 모두 마시지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인간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물을 아껴 몸과 얼굴을 닦아내었다.
모욕과 오물이 범람하는 상황에서도 짐승처럼 최후를 맞지 않겠다는 품위의 결단을 내린 사람은 수용소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사도 바울을 말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신성한 성전입니다. 성령의 광채가 머물 수 있도록 여러분의 내면을 잘 지켜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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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