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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대한인동지회 100년을 돌아본다 (1)

2021-06-2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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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대한인동지회 100년을 돌아본다 (1)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100년을 돌아본다 (1)


2021년 7월 7일은 하와이 대한인동지회가 설립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본보는 동지회 100년을 기념하여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이 제공하는 동지회의 활동의 약사 게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하와이 역사재조명 작업을 이어간다. <편집자주>



1. 동지회 조직과 활동 준비

1913년 2월 3일부터 호놀룰루에 살면서 학교 운영, 한인 YMCA 조직, 태평양잡지 편찬에 주력하고 있던 이승만은 1919년 1월 16일후에는 미주 본토의 필라델피아와 와싱톤 D.C.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후 4월 14일 중국 상해에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그리고 4월 24일 한성(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이승만은 "President"로 영역하였음)로 추대,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임정안의 여러 세력간의 알력과 워싱톤에 설치된 구미위원부의 내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6개월만에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1921년 6월 29일에 돌아 온 이승만은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임정을 옹호하며, 교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고, 임정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는데 있었다.

7월 7일에 민찬호, 안현경, 이종관의 명의로 15조로 된 <동지회 규정>을 선포하였다. 동지회 사무실은 밀러 스트리트(Miller Street) 1306번지에 위치한 교민단 (국민회)총회관에 두었다.


한인기독교회의 목사 민찬호가 단장이고, 제일한인감리교회 (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평신도 지도자이며 사업가인 안원규가 부단장이었다.) 사무실 임대료를 냈는지 아니면 무료로 사용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단체들이 서로 도왔음을 알 수 있다.


2. 동지회의 경제활동

동지회는 1924년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하와이 한인대표회의를 개회하고 여러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그 중 중요한 사항은 동지회 내에 실업부(實業部)를 두어 민족 경제력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 주에 100 달러씩 팔아 자본금 50,000 달러를 모집하여 동지합자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1925년 12월 13일에 회사의 이름을 동지식산회사로 창립하였다.

동지식산회사는 1주에 100 달러씩 700주를 모집할 것으로 목표를 삼았으나 한 달 후에 목표액의 43%인 약 30,000 달러가 모금되었다. 이승만은 이 중에서 약 14,000 달러를 들여 힐로 남쪽 18마일 떨어진 올라아 (Olaa) 지역에 약 960에이커의 오히아(ohia) 나무 임야를 구입하고 ‘동지촌’이라 불렀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년으로 더 이상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경제력을 잃은 한인들을 입주시켜 임야를 개간하면서 자작농장을 운영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일구어 주려고 마련한 농장이었다. 이 농장에서 한인들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였고 또 소(牛)목장도 운영하였다. 노인 노동자들의 수가 더욱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그들이 자작농의 기회를 통하여 경제력을 키워 사회로 복귀함으로써 하와이 지역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동지회 활동을 위한 재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동지식산회사가 자본금 30,000 달러중의 약 반을 부지매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남은 액수로는 임야개간을 하기에 아주 어려웠다.

당시 동지식산회사 자본금 모금이 잘 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한인들의 재정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3.1 운동 후 국민회는 곧 “독립운동비” 모금을 시작하여 5월 말까지 11,100달러를 국민회 중앙총회 (미주 본토), 현순, 김규식, 이승만 등에게 보냈고 또 계속하여 모금하였다.

또한 1919년 9월부터 1922년 4월까지 구미위원부는 81,000 달러의 독립공채를 판매했고, 또한 예납금 혹은 의연금 등의 명목으로 67,300 달러도 모금했다. 한인들은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기금 이외에 국민회와 부인구제회에도 기금을 내야 했다. 1920년에 하와이의 한인 인구가 4,950명이었고, 1930년에는 6,461명이었는데,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필요한 경비도 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지촌이 한인들의 경제력 증가를 목표로 한 이상주의적인 사업이었지만 한인들은 쉽사리 더 투자 할 수 없었다.

동지촌은 자구책으로 벌목한 오히아 나무를 숯으로 만들어 팔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재래식 또는 가내용 숯가마를 만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제조업 전문 회사의 사장의 자문을 받고 호놀룰루직업학교의 강사와 많은 실험을 거쳐 과학적인 새 방법의 숯가마를 1928년 8월에 설치하는데 성공하여 드디어 24시간에 4톤의 숯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시험적으로 300 자루 (이 자루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는 알 수 없음)의 숯가루를 미국 서해안지역에 보냈다. 그러나 화학자료로 사용되기에는 적당치 않음이 판명났다.

이승만은 이어서 1928년 9월에 한 기계 회사 지점장의 도움으로 제재소를 설치하였다. 본격적으로 가동된 제재소와 숯제조 사업을 위해 서양인, 하와이 원주민, 필리핀 사람도 몇 명 포함하여 40여명이 동지촌에 살면서 일했다. 마침, 이승만은 진주만 해군성의 조선造船 용골대龍骨臺 (keel blocks) 납품 입찰 소식을 접하고, 제재소를 설치해 준 지점장으로부터 기일 내에 납품할 수 있다는 확언을 받은 후 입찰하였다.

동지식산회사의 단독 입찰이어서, 동지식산회사는 1929년 3월 18일에 진주만해군성에 69,813 board feet (1 board foot= 나무 판자 두께 x 넓이 x 길이 ÷ 12)의 목재를 납품하기로 미국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계약기간에 목재를 납품할 수 없었고 또 납품한 아주 적은 양의 목재마저 불량품으로 판정받았다.

한편, 동지식산회사는 호놀룰루의 호텔 스트리트에 가구점을 차리고, 목재가구를 만들어 팔았으나, 이 가구점도 자금 부족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결국 동지식산회사는 부채 20,000 달러를 지고 1931년 4월경에 문을 닫게 되었다. 동지식산회사 주식을 샀던 사람들은 물론 한인 동포들의 실망과 원망이 컸음은 물론이다.

동지식산회사의 올라아 부지 960 에이커는 1933년 7월 12일에 경매에 붙여졌는데 이 땅의 저당권을 가지고 있던 회사가 12,500달러에 매입하였다. 동지촌이 운영되는 5년 반 동안에 개간된 임야와 숯가마, 제재소, 그리고 여러 채의 집들이 포함된 부지가 매입 가격보다 적게 입찰 판매된 것이다. 더구나 이 가격은 이승만을 비롯하여 동지식산회사 이사들이 믿었던 100,000 달러 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실망스런 금액이었다.

현재 동지촌 부지는 분할되어 개인 소유지가 되었고, 농경지 혹은 개인주택지로 바뀌어 드문드문 주택이 들어서 있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숯 가마터는 개인주택지구 네 필지에 접해 있다. 아직도 숯가마는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원형이 남아 있다. <사진 위>

가마 속의 철물은 많이 부식되었지만 높이 약 6.5 피트. 넓이 6 피트, 그리고 길이 50 피트 정도의 숯가마 속에는 나무를 담은 대형 철제 바구니가 들어갈 수 있도록 놓은 35 인치 넓이의 선로(궤도)가 있고 숯가마 밖에는 바퀴가 달린 철제 바구니가 선로위에 멈추어져 있다. <사진 아래>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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