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고 있다. 아침 뒤뜰에 긴 솟대를 올려 함초롬히 핀 접시꽃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발돋움을 하고 섰다. 그 사이로 블루제이 한 쌍이 푸드득 날아든다. 날렵한 날갯짓을 보며 분수대 물을 채우려 돌아섰다.
순간 쿵 하는 소리에 흠칫 놀란다. 블루제이 한 마리가 창문에 부딪혀 마당에 툭 떨어진다. 금방 날개를 뒤집고 숨을 할딱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친구 새가 넘어진 새의 머리와 몸을 연신 쪼기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깨우려는 몸짓이다. 친구 새가 쫄 때마다 널브러진 새가 폴짝 폴짝 튀어 오른다.
나는 숨죽이고 이 광경을 바라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친구 새는 연신 부리로 깨우지만 누운 새는 미동도 없다. 숨결도 점점 엷어져간다. 마치 사경에 빠진 사람을 심폐소생술로 깨우려는 안간힘 같다.
나는 새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부딪친 그 큰 충격에 살 수 없었으리라. 부삽을 들고 묻어주려 나갔다. 뒤 곁을 돌 무렵, 난 또 한 번 놀랐다. 널브러졌던 새가 고추 앉은 것이다. 머리를 외로 꼬고 숨을 고르고 있다. 십여 분이 더 지난 후, 분수대에 올라 목을 축인다. 그리고 후루룩 날아갔다. 접시꽃 위로 친구가 날아간 하늘로 솟구쳤다.
새도 머리를 부딪치면 기절한 뒤 깨어나는 걸 처음 알았다. 새도 사람처럼 다친 친구를 살리려 애쓰는 걸 처음 내 눈으로 보았다.
그 친구 새를 보며 내 옛 은인들을 생각했다. 미국 온지 46년째.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낯선 환경에 부딪치며 갈팡질팡하던 나를 깨워 새 인생을 살게 해주신 네 분의 평생 은인. 그 중에 가장 연로하신 엘비라와 소식이 끊긴지 이태가 지났다.
매년 명절 때면 전화나 카드로 안부 드리고, 구순 때는 와이오밍 댁까지 찾아뵀는데, 전화가 끊긴 것이다. 다른 연락처를 모르니 막막했다. 고령이시라 걱정이 컸다.
엘비라는 내 첫 직장 와이오밍 주 환경청에서 나를 뽑아준 직속 상사, 밥의 사모님이다. 우리가 그 외딴 곳에서 5년을 사는 동안, 그녀는 우리가족의 멘토였다. 미국 가정의 삶을 몸소 체험케 해주고, 교회와 친절한 이웃들과의 사귐을 적극 주선했다.
우리가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후에도, 밥이 세상 떠난 후에도, 우리 아들의 대모로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큰 사랑을 부어주셨다.
엘비라를 찾으러 인터넷의 구인 사이트를 눌렀다. 다행히 친척 몇 이름과 연락처들이 나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의심에 찬 대응에 깜짝 놀랐다. 물론 요즘 세상에 인터넷으로 사람을 찾는데 대한 불신감이 이해는 갔다.
그러나 전화에 내가 누구인지, 왜 엘비라를 찾는지, 어떤 관계인지를 소상히 밝혔음에도 상대는 반신반의했다. 가까스로 그녀가 요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누군가가 연락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제야 엘비라가 오래전 밥과 재혼한 부인이란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고급 저택이 생각났다. 혹시 자식 간 재산 다툼 때문에 불현듯 나타난 엘비라의 옛 친구를 의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블루제이가 연신 부리를 쪼아 친구를 살리려던 감동이 떠나지 않는다. 그도 넘어진 친구 새의 곡간을 탐했을까? 이제 은인, 엘비라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옛 미국의 정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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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