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학중앙연구원 신간 ‘조선시대 선비의 과거와 시권’
‘공원춘효도’의 일부 모습 [성균관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조선시대에 주로 쓴 용어 중에 '동접'(同接)이라는 단어가 있다. 같은 곳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을 뜻한다. 오늘날 동아리나 '스터디 그룹'에 해당한다.
재주가 있거나 공부할 환경을 갖춘 사람은 혼자 과거 시험에 대비했지만, 보통은 여럿이 함께 과거를 준비했다. 스터디 그룹을 만드는 작접(作接)과 해체하는 파접(罷接)은 자유롭게 이뤄졌다. 모임을 유지하는 기간도 제각각이었다.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조선시대 과거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정리한 학술서 '조선시대 선비의 과거와 시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펴냄)에서 "동접은 대개 과거 시험을 앞두고 서원이나 산사 등 일정한 장소에 들어가 함께 숙식하며 집단적·집중적으로 공부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동접 공부 방법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학습 과정 완수하기, 수시로 묻고 답하며 학문과 덕을 닦기, 자체적으로 모의시험을 실행해 답안을 쓰고 평가하기, 향교·서원·지방관이 주관하는 백일장 등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 등 네 가지를 소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접이 공부만 같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 시험장인 과장(科場)에서 함께 답안지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과장에서 과문(科文)을 지을 때도 동접은 함께 의논했고, 한 사람이 좋은 문구를 지으면 서로 돌려가면서 베끼는 식으로 답안지를 써냈다"며 "응시자들은 동접 간에 글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범법 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6세기에 유생들이 모여 공부한 향교나 성균관 등에서 이러한 풍습이 생겼을 것"이라며 조선에 과거 시험을 치르는 전용 장소가 없었고, 오륜(五倫) 중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있어 친구의 곤경을 자연스럽게 도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조선 후기로 오면서 과거 응시자가 늘어나 과장은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가 됐고, 입문관과 군졸은 응시자가 하인을 대동하거나 친구끼리 모여 이야기를 해도 제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과장 풍경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에 잘 나타나 있다. 커다란 우산 아래에 여럿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세황은 이 그림의 위쪽에 남긴 글에서 "개미 떼같이 많은 응시자의 과거 시험 전투가 무르익는다"며 "등불은 휘황하고 사람들 소리는 시끌벅적하다"고 했다.
저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 것은 공동 제술을 금지한 법률 조문보다는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과 향촌사회의 실천 덕목이었다"며 "그들에게는 신의와 의리, 인정이 법보다 우선했다"고 강조한다.
이어 "동접 사이에는 스스로 실력의 순위를 이미 잘 알고 있어서 합격자를 예상할 수 있었고, 누가 합격하든 그것은 하늘의 뜻이고 운명의 소치일 뿐이었다"며 "집권 세력은 시험 문제를 은밀히 유출하거나 청탁해 그들의 자제나 이해 관계인의 합격은 이미 확보했기에 일반 유학생이 아무리 접(接)을 이루고 협력해 글을 써도 눈감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