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콜 클래식] 5.18
2021-05-14 (금)
이정훈 기자
5.18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5.18 광주항쟁, 민주 항쟁 등 여러가지 명칭이 있지만 처음에는 그저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5.18은 대한민국의 여러 무거운 문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사실 떠올리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설사 그 시대를 살았고 또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5.18은 누구에게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5.18’이라는 주제를 달았다고 해서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지나간 이야기들을 꺼내 누가 옳고 그른 가를 가려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당시 신문사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을 담담하게 나누어 보고 싶을 뿐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5.18때만큼 신문부수를 많이 확장한 때도 없었다. 물론 본국지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았지만 5.18이 끝날 때까지 약 한 달간 지역 신문의 3분의 2를 거의 광주 사태의 이야기로 도배하며 수많은 독자들을 끌어 모았었다.
미국 주요 TV 방송국 CBS, NBC 등도 5.18 당시, 특히 광주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던 5월 20일을 전후하여 몇 일간 거의 뉴스의 톱을 장식하곤 했으니까 미국에 살면서 광주사태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 살던 교포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군부독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에서 어떤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 시민들의 희생은 안타까웠지만 살아 생전에 그 때처럼 주먹을 불끈 움켜쥐게 했던 때도 없었을 것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쇼스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기차역에서 레닌의 연설을 직접 들었고, 그 장면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했다 한다. 5.18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쇼스타코비치의 1917년 같은 것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80년 1월이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던 10.26사태 이후 약 3달 만이었다. 당시 공항에 마중 나왔던 친지 중 한 분이 ‘너 전두환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박 대통령의 시해 사건을 수사 중인 수도경비 사령관으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그 분은 전두환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말해줬다. 사실 한국을 떠나오면서 박정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국에도 민주화의 봄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에게 전두환이란 존재는 너무도 불길한 그림자였다. 그 후 정치인들이 구속되고 광주 사태가 터지자 기어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작은 소요였지만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문사의 업무도 바빠졌고 특히 지방판을 담당했던 LA 지국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5.18을 취재했다. 미국의 신문들과 방송들도 한국의 사태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교민들의 관심도 온통 광주에 집중됐다. 광주 사태는 혼돈의 극치였던 겉보기와는 달리 무지막지한 폭동는 아니었다. 광주는 무정부 상태로 군과 대치하고 있을 당시에도 시민들이 솔선수범 교통을 통제하고 의료 봉사 등 여러가지 마비된 사회업무를 자원하는 모습들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다만 일부 과격한 청년들이 트럭 등을 탈취하여 ‘XXX 찢어 죽여라’ 등의 현수막을 달고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들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는데 조금 눈쌀을 찌푸리게하는 문구들을 제외하고 광주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당시 미국의 뉴스 전망대는 한국의 군부가 조만간 탱크, 헬기 등을 동원하여 광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 보도를 했기 때문에 광주가 조만간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그 끝을 보고야 말 것을 알았지만 일개 시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방불케하는 대대적인 공격 앞에 광주시민들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당시 미국의 뉴스는 광주의 피해자들을 (희생 1천여명 포함) 비공식 집계 부상자 3천여명 정도로 보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학생들과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희생자가 조금 늘어난 이유는 광주시의 경찰 대원들과 진압군과의 격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시민의 목숨을 보호해야했던 경찰들의 입장에서 군의 과격한 진압은 다소 충격이었던 같았다. 그 때문에 전두환 군부는 광주사태 이후 몇몇 용공분자들이 경찰서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군과 대치했다고 헛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당시 미국 교포들의 입장에서 광주사태는 저항의식의 상징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만끽케했던 민주화 운동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한 광주의 희생은 너무 컸다. 그러나 그 당시의 희생자들은 그후 살아남은 자들이 받았던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그 서글픔이 덜 한 편이었다. 전두환 군부는 이후 정권을 장악하면서 광주 시민들과 일부 호남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는데 당시 광주지역 주민들에게 대한 인권말살의 폐해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지금도 가끔 그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 오히려 그 쪽에서 5.18이야기를 꺼려하곤하는데 당시의 상처는 차마 추억하기조차 처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5.18은 한국의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또 그 밑거름으로 작용했지만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론은 영원히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전두환 군부는 군부 나름대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호남도민들을 빨갱이로 몰아갔고 호남도민들은 또 호남도민대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에 이를 갈며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광주사태야말로 대한민국을 국론을 초토화시키고 말았으니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5.18 바로 옆에 5,16이 나란히 누워있다는 것이다. 5.16 또한 보기에 따라서는 나라를 바로 세워보겠다고 젊은 군인들이 목숨 걸고 봉기한 거룩한(?) 혁명이기도했다. 따지고 보면 5.18은 5.16이 정당화 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었던 희생양이었는지 모른다. 광주를 밟고 군부는 30년의 세도를 누렸으니 5.18은 5.16의 그림자나 다름없었다. 당신이 누구 편이든 5.16이 가는 곳에는 늘 5.18의 그림자가 따라 갈 것은 분명하다.
<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