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몰락

2021-01-12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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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통령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은 외국에 대해 미국을 대표하는 국가 수반이며 세계 최강인 미군의 통솔권자이다. 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 조직의 최고 책임자이고 국내법의 최종 심판자인 연방 대법관과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지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얼핏 보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직책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정부 조직은 민의를 대표하는 의회로 봤다. 미국의 최고법인 연방 헌법 1조에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를 놓은 것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들은 입법권의 독점자인 의회가 정한 법을 충실히 시행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며 대통령이 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 의회는 언제든지 대통령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의회의 대통령 탄핵권이 그것이다. 반면 대통령은 한 명의 연방 의회 의원도 축출할 수 없으며 의회를 해산할 권한도 없다.

나라의 최고법인 헌법을 고치는 일도 의회만이 할 수 있다. 연방 헌법은 연방 의회 상하원 2/3의 찬성이 있을 경우 헌법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으며 이것이 주 의회 ¾의 동의를 얻을 때 효력을 발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의회가 이처럼 대통령에 비해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법과 정치 제도가 영국의 그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도 옛날에는 왕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했다. 사정이 달라진 것은 13세기 초 존 왕 때부터였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다스렸던 위대한 영국왕 헨리 2세의 막내 아들인 존 왕은 형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운좋게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연전연패로 영토를 거의 모두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발생한 전비를 영주들에게 세금을 거둬 충당하려 했다.

영주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1215년 왕이라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영주들의 동의없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조약을 존 왕에 강요했다. 힘이 모자란 존 왕은 이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훗날 영국 정치적 자유의 기초가 된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다.

이 문서 핵심 조항은 25인으로 구성된 ‘영주 회의’가 존 왕이 약속을 잘 지키는가를 감시하며 왕이 약속을 어길 경우 왕의 재산을 차압해 왕이 끼친 손해를 보전할 수 있게 한 61조다. 이로써 ‘영주 회의’의 왕에 대한 우위가 확립됐다. 이 ‘영주 회의’가 발전한 것이 영국 의회다. 17세기 영국 왕 찰스 1세가 이를 어기고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으려 하자 의회는 독자적인 군대를 구성해 왕과 맞서 싸웠으며 전쟁에서 이긴 후 왕을 1649년 참수하고 만다.

지난 주 미 역사상 처음 대통령이 우매한 대중을 선동해 상급 기관인 의회를 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트럼프는 워싱턴에 모인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연방 의회가 조 바이든의 당선을 공식 인증하기 전 “그리로 가 난동을 부리라”며 무력 점거를 선동했다. 그는 자신이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거짓말을 되풀이 하며 “사기 치는 사람을 붙잡았을 때 매우 다른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다”며 폭력 사용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 결과 미 역사상 처음 폭도들이 의사당에 난입하면서 경찰관을 비롯 5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이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트럼프에 있음은 물론이다. 연방 하원은 펜스 부통령이 수정 헌법 25조에 따라 트럼프의 대통령 직 수행을 즉시 정지시키지 않을 경우 탄핵 절차를 밟을 것을 공언했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마저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미국 민주주의 비극이자 수치이지만 트럼프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한 때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제라도 트럼프의 본질을 직시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인간이 미국 정치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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