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이 당선한 것보다 트럼프가 낙선한 것이 더 기쁘다는 사람들이 있다. 두달 정도만 참으면 ‘쇼맨 보수 영감태기’가 TV화면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좋아하는 내 또래 꼴통보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트럼프는 가도 그가 4년간 뿌려놓은 ‘트럼피즘(Trumpism)’은 계속 뭉그적거리며 한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 기조의 ‘미국 제일주의’를 표방한 트럼피즘은 실상은 그의 지지기반인 ‘백인중산층 제일주의’다. 이민자와 망명자를 배척하고 백인우월주자인 ‘자랑스런 사내들(Proud Boys)’을 밀어주며 흑인 인권시위대를 무정부주의 폭도로 몰아세운다. 중남미 범죄자들의 밀입국을 막겠다며 멕시코국경에 장벽을 쌓고, 이슬람 무장 세력의 테러를 예방한다며 회교도들의 미국 입국을 봉쇄했다.
미국이 코로나바이러스 최악지옥으로 전락하자 중국 탓이라고 우기고 세계보건기구(WHO)도 중국편이라며 돌연 탈퇴했다. 중국과의 국력대결에서 우방국들이 미국편에 줄서도록 압박하고, 혈맹인 한국엔 방위비를 더 내라며 미군철수를 위협한다. 노벨평화상을 노리며 북한 핵을 없앤답시고 정상회담 쇼를 거푸 벌였지만 김정은의 콧대만 높여놨다. 밥 먹듯 하는 거짓말도 트럼피즘이다.
그 트럼피즘이 선거 직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극우단체 ‘애국전선’ 소속 신나치주의자들이 ‘정복 못하면 죽어라(Conquer or Die)’라는 히트송 제목을 연호하며 피츠버그 도심거리를 행진했다. 이민자를 용납 못한다는 결의다. 나치의 고전적 슬로건인 ‘피와 국토(Blood & Soil)’도 등장했다. 독일이 백인 아리안족의 땅이라고 나치가 주장했듯이 미국도 백인 민족국가로 만들자는 심뽀다.
미국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외국 테러단체가 아닌 국내 자생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라고 지난달 조국안보부(DHS)가 밝혔다. 올해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사건(미수 포함)의 67%가 이들 소행으로 분석됐다고 했다. 테러수법도 ISIS나 알카이다처럼 대담하다. 지난 2017년 뉴욕과 샬롯스빌(버지니아)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자동차를 일부러 군중 속으로 돌진시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들은 백인국가인 미국이 유색인종 이민자들에 침공당한 것으로 믿는다고 연방수사국(FBI)의 고위 관계자가 2주전 세미나에서 지적했다. 그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이 ‘침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훈련받으며 제2의 남북전쟁 같은 내란에도 대비하고 있다고 밝히고 워싱턴·오리건·아이다호 등 서북부 지역에 잠적해있던 이들 단체가 근래 전국 각지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 3명중 2명이 바이든을 찍은 캘리포니아 주에도 트럼피즘은 건재하다. 중가주의 대표적 농장지역인 프레즈노에서 선거전 수개월간 매주말마다 수천명이 트럼프 지지시위를 벌였다. 차량 600여대가 참여한 ‘트럼프 캐러밴’이 99번 하이웨이를 프레즈노에서 남쪽 베이커스필드까지 메우기도 했다. 이들은 트럼프의 당락과 관계없이 트럼피즘은 영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한 골수팬 여성은 캘리포니아에서 400여만명, 전국에서 7,200여만명이 트럼프에 투표한 이유는 그의 정강정책이 좋아서라기보다 그가 본디 직업정치인이 아닌 아웃사이더이고, 언론매체들이 괜히 싫어하지만 뚝심으로 맞섰고, 홀대받는 농민들에게 기성정치인들과 달리 귀를 기울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선거를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트럼프가 당선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바이든과의 첫 공개 TV토론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야단쳐보라는 사회자의 요청을 따돌리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랑스런 사내들’을 향해 “(잠시)물러서서 대기하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무소불위의 트위터 강자인 트럼프는 퇴임 후 8,800여만명의 ‘대기 중인’ 팔로워들에게 계속 입김을 불어넣을 터이다. 트럼피즘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의 결정적 배경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발간 첫날 기록적으로 88만7,000여부가 팔린 자서전 ‘약속의 땅’에서 백인들이 4년전 똘똘 뭉쳐 트럼프를 찍은 것은 사상 첫 흑인대통령에 대한 반작용이었지만 결국 미국 국민의 양분현상이 초래됐다며 개탄했다. 나라를 양분시키는게 어디 인종개념 뿐인가? 한국에선 촛불과 태극기의 상극이념이 국민을 봉합할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갈라세워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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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