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나친 ‘순종’(純種) 집착

2020-11-18 (수) 12:00:00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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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몇 분과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4세기 훈(흉노) 족의 유럽정벌이 화제에 올랐다. 훈 족은 고조선 서쪽 지역에 살던 유목 기마민족으로 4세기 후반 유럽에 들어가 거대한 제국을 세우고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일으켰다. 강력한 활과 질풍노도 같은 기동성, 그리고 뛰어난 공격 전술 등을 바탕으로 서진을 하면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민족이다.

이런 침략과 인적 이동, 그리고 교류는 필연적으로 피가 섞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한국인을 과연 한 핏줄로 연결된 단일민족이라 볼 수 있을 것인지로 옮겨갔다. 물론 그 자리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이 순혈민족이라는 믿음이다. 물론 한국인들의 피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는 주장은 믿고 싶은 이데올로기일 뿐 과학적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한국인들의 70%는 북방계이고 30% 정도는 남방계인 것으로 나타난다. 한민족은 오랜 세월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다. 또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왔다. 지난 수십 년 사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이 급증하고 다른 인종들과의 결혼도 급속히 늘면서 순혈주의의 환상은 우리 눈앞에서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순혈주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결코 순혈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배타적 관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일부는 폭력적 태도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시대착오적 인식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연방하원에 당선돼 한때 한인사회와 모국의 자랑거리가 됐던 김창준 전 의원의 입에서 이처럼 시대착오적이라 의심 받을 만한 발언이 나온 것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김 전 의원은 뉴저지의 앤디 김 의원과 워싱턴 주의 한국계 혼혈인 메릴린 스트릭랜드 당선이 확정된 날 한국의 한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스트릭랜드에 대해 ‘순종’(純種) 운운하는 발언을 했다. 순종은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종”을 뜻한다.

그는 “한 분은 뭔가 한국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흑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여자니까 한국계 의원이지만 100% 한국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며 “100% 한국사람, 저 같은 순종이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순종’의 반대말은 ‘잡종’이다. 도무지 21세기에, 그것도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정치인 생활까지 했던 인물의 말이라고 믿겨지지 않는다.

순수함에 대한 집착 속에는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섞인 것은 불순하고 열등하다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은 비단 핏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거부감 역시 이런 인식과 맞닿아 있다.

문제의 발언을 한 김창준 전 의원은 백인 우월주의자들 눈에 결코 ‘순종 미국인’이 될 수 없다. 외모는 물론이고 영어발음도 그렇다. 그럼에도 지역 주민들은 편견 없이 그를 정치인으로 선출해 주었다. 그의 개인적 성공을 가능케 해 준 것은 다양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포용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트릭랜드는 평소 자신의 뿌리에 대한 긍지를 드러내왔다. 홈페이지에는 “부모님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별과 고난을 견뎌왔다. 그들은 내게 열심히 일하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약자를 위해 일어서라고 가르쳤다. 어머니는 내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줬다“는 글을 싣고 있다. 스트릭랜드가 김창준 전 의원 눈에 ‘100% 순종 한국인’은 아닐지 몰라도 한인사회를 망신시키는 일 없이 어쩌면 100% 순종 정치인들보다 더 열심히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해 줄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김 전 의원은 파문이 일자 “오랜 미국생활을 하다 보니 단어의 뉘앙스를 잘 파악하지 못해 생긴 실수”라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일선 기자시절 여러 차례 만났던 김 전의원은 누구보다도 한국말을 잘했다. 또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한지도 오래 됐다. 단순한 말실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해명은 그렇다 쳐도 그의 사과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믿고 싶다. 아울러 자신이 이뤘던 아메리칸 드림이 다름에 대한 미국사회의 관용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김 전 의원이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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