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불과 와인과 과학

2020-09-29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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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다. 결국 올해도 어김없이….

와인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산불 시즌만 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캘리포니아의 연례행사인 산불대란이 휩쓸고 가는 지역에 반드시 와인산지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산불시즌이 오기도 전인 8월부터 북가주에서 마른번개가 일으킨 산불 2개가 지금까지 타고 있으니, 앞으로 10월까지 얼마나 더 심한 화상을 입게 될지 걱정스럽다.

산불로 인해 와인산지가 입는 타격은 엄청나다. 일차적 피해는 포도밭, 와이너리, 양조시설이 화마에 소실되는 재난이다. 2016년 중가주 파소 로블스에서 수많은 와이너리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데 이어 2017년에는 나파, 소노마, 멘도시노 지역에서 40명이 숨지고 5,700개 건물 전소, 30여개 와이너리가 파손되는 대재난이 있었다. 2018년엔 남가주의 말리부 와인산지가 울시 파이어에 휩싸여 50여개 포도원과 와이너리가 거의 모두 파손됐다.


이같은 피해는 와이너리를 넘어서 수만명의 농부와 직원들, 와인 도매·소매·수입상들, 호텔·식당·투어 등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쳐 한해 수십억달러 규모의 지역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초래한다.

또 다른 타격은 정전과 강제단전이다. 해마다 9월에서 10월까지, 정확히 산불시즌과 겹치는 포도 수확기는 와이너리가 일년 중 가장 바쁘고 중요한 계절이다. 연중 방문객도 가장 많고, 와이너리 양조장에서는 사람들과 트럭들과 기계들이 풀가동되어 북적인다. 포도밭에서는 금방 딴 포도가 바삐 트럭으로 옮겨지고, 수확한 포도송이들은 즉시 양조시설로 옮겨져 가지제거, 분류, 파쇄를 거쳐 발효와 펌프가 시작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강제단전이 실시되면 와이너리들은 치명적 손실을 입게 된다. 모든 과정이 컴퓨터 기계화돼있기 때문에 전기가 없으면 작동을 할 수 없고, 특별히 발효는 온도 조절이 굉장히 민감해서 정전이 되면 한 해 수확을 망칠 우려까지 대두된다.

바로 지난 주말에도 나파를 포함해 북가주 16개 카운티에서 이틀 동안 강제단전이 실시됐다. 고온건조한 날씨와 강풍이 예상될 때 전기불꽃에 의한 발화를 차단하기 위해 내려지는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포도수확기에 단전이 연례화된다면 북가주의 와인산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심각한 피해는 산불 연기가 포도열매를 오염시켜 와인양조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달 초 북가주 전체가 연기와 재로 뒤덮여 하늘이 오렌지색으로 온통 붉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풍경에 “화성 같다” “핵겨울 같다”는 반응이 잇달았는데 그처럼 엄청난 대기오염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포도나무들도 견디지 못한다.

한창 익어갈 때 나무 타는 연기를 쏘인 포도는 와인으로 빚었을 때 스모크 향과 맛이 배어들어 섬세한 와인 맛을 해치게 된다. 스모키 향은 오크통 숙성에서도 얻어지지만 산불연기로 인한 스모크 아로마는 오크향과는 달리 그을린 향, 거칠고 씁쓸한 숱 혹은 재떨이 맛이 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17년 대화재는 10월에 발생했기 때문에 90% 이상 수확이 끝난 상태여서 와인양조에 큰 피해가 없었지만 올해는 수확 전인 8월부터 산불이 기승을 부렸으니 총체적 난국이 예상된다. 지금 나파 밸리의 ETS 포도샘플 검사실은 스모크오염 검사 요청이 쇄도하면서 업무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40일 후에나 결과가 나오는 적체현상을 빚고 있다고 한다.


2020 캘리포니아 와인 빈티지가 입은 화상이 얼마나 깊을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벌써 많은 와이너리들이 수확 자체를 포기하거나 ‘2020 와일드파이어 빈티지’라는 자조적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업계는 실의에 빠져있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캘리포니아 산불이 기후변화의 결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18일 UC 데이비스 연구팀은 기후변화로 북가주 대형 산불이 1984년 이후 10년마다 10%씩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산림관리 문제”라고 주장한다. 지난 14일 새크라멘토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웨이드 크로풋 가주 천연자원부 장관이 “기후변화와 과학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자 “점점 더 시원해지기 시작할테니 그냥 지켜보라”고 했다. 이에 크로풋 장관이 “과학이 당신의 의견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과학이 뭘 알아”(I don’t think science knows, actually)라고 응수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도 과학을 무시하고 “사라질거야” “사라지고 있어”를 반복해온 대통령 때문에 미국은 코비드-19 확진자 700만명, 사망자 20만명을 넘어선 세계최대 ‘코로나 강국’이 됐다. 과학 없는 정부가 4년 더 이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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