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합리성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의 백악관 생활 내내 확인된 사실이지만 대선을 앞두고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해지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할 만한 얘기와 해서는 안 될 주장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을 상실한 것 같다. 그에게 쓴 소리나 합리적 조언을 했던 인사들은 예외 없이 버림을 받거나 쫓겨났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머릿속 생각은 한층 더 극단으로 치우치고 그의 입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다.
이번 달 초 폭스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트럼프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비행기로 폭력배를 실어 날랐다”는 소문에서부터 “일부 부자들이 인종차별 시위에 돈을 댄다” “바이든을 조종하는 은밀한 세력이 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음모론을 제기했다. 마치 인터뷰를 통해 극우 음모론 단체인 큐어넌이 마구 퍼뜨려온 황당한 주장들을 총 정리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런 트럼프를 ‘음모론의 우두머리’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이런 음모론을 정말 철썩 같이 믿고 입에 올린 것이라면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거짓인 줄 알면서도 퍼뜨린 것이라면 사악하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무한책임이 지워지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이런 무책임한 주장들을 바이러스처럼 퍼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트럼프의 행태는 나르시시스트라는 그의 심리적 특성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자기애가 병적으로 강한 나르시시스트일수록 음모론에 잘 걸려든다.
나르시시스트 심리의 핵심은 부풀려진 자기애이다. 망상적인 감정에 빠져있는 것이다. 음모론은 이런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자신만이 상황을 딱 부러지게 이해시켜주는 설명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10여 년 전 미국의 보수진영에서 UC 버클리의 학자 4명에게 보수주의의 실체를 규명해 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설문과 뇌파 검사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연구진이 찾아낸 보수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모호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평등에 대한 막연한 혐오와 두려움,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많이 나타난다고 연구진을 밝혔다. 연구를 의뢰한 보수진영으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결과였겠지만 양극화 속에서 극우가 보이고 있는 행태를 설명하는 데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왜 음모론이 보수층, 특히 극우성향인 사람들 사이에 기승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모호함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음모론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이른바 ‘인지 종결’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단칼에 정리해 자신의 인지적 갈등을 매조지려 한다. 특히 주변 상황이 자신의 바람이나 욕구와 달리 흘러갈 때 음모론은 한층 더 유혹적이 된다. 통제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색깔론’이 극우의 이런 만능 칼이 되어 주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모호함의 결정체라 할 만 하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정체는 아직까지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미래 상황 역시 확실한 게 별로 없다. 모호함을 싫어하는 우리의 성향에 비춰볼 때 코로나19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심리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음모론은 이런 불안을 완화시켜준다.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지면서 모호함의 안개가 싹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이처럼 세상이 모호함으로 가득 찰 때 우리의 성숙한 판단은 종종 마비돼 버린다. 여기에는 의도를 가진 일부 정치세력과 언론의 부채질이 한 몫 한다. 많은 경우 음모론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를 만들고 퍼뜨리는 소수에 의해 다수가 걸려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상황은 모호함에 대처하는 개인과 사회의 자세와 관련해 분명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나와 공동체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받는 어둠과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따라가야 할 것은 이성과 지성이 비쳐주는 작은 불빛들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잘 견딜 수 있어야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
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