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먼 길 오셨네요, 아가씨”

2020-08-25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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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담배 ‘버지니아 슬림스’는 “먼 길 오셨습니다”(You‘ve come a long way, baby)라는 광고문구로 유명하다. 여성흡연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는 뜻의 헤드카피로, 페미니즘운동이 한창이던 1970~80년대 미 전국의 빌보드와 TV에 등장해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 주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면서 이 광고 카피가 문득 떠올랐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첫 아시안, 첫 여성으로서 부통령 후보에 지명된 카말라 해리스 때문이었다. 원격으로 열린 온라인 전당대회였지만 ‘먼 길’을 걸어온 역사적 순간에 대한 열기와 흥분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나흘 동안 이어진 대회에는 미셸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낸시 펠로시, 엘리자베스 워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등 미 정계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스타 여성정치인들이 총출동해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의 선택을 촉구하고, 인종과 성별의 장벽이 없는 미국의 미래를 약속했다.

때마침 내일(8월26일)은 여성참정권(Suffrage)을 허용한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된 지 꼭 100년 되는 날이다. 여자가 공직에 나서기는커녕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이 100년밖에 안 됐다는 얘기다. 이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힘겹게 싸워야했는지, 80년에 걸친 투쟁의 역사와 기록이 이를 증언한다.


지난 주 열린 수정헌법 19조 100주년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수잔 B. 앤서니를 사면했다. 앤서니는 1872년 뉴욕주 대통령선거에서 불법 투표한 혐의로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던 여성참정권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참정권 통과를 보지 못한 채 1906년 죽은 그녀의 묘소에는 지금도 선거일마다 수천명이 방문, 비석에 ‘나는 투표했다’ 스티커를 붙이고 간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뉴질랜드다. 1883년에 선거권을, 1919년에는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그 다음으로 호주가 1902년 여성참정권을 부여했고, 이어 북구와 유럽의 나라들이 20세기 초 점진적으로 선거권을 허용했다. 한국(1948)과 북한(1946년)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선거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미국에서 여성이 흑인남성보다도 늦게 투표권을 허용받은 이유는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흑인참정권은 1915년 허용됐으나 흑인의 사회경제정치활동을 원천봉쇄한 짐 크로법에 묶여 1965년까지 이를 행사할 수 없었다.)

100년전 여성은 경제력이 없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으며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됐다. 50년 전인 1970년대까지도 남자의 사인이 없으면 여자는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지 못했고 은행 대출도 받지 못했다. 배심원제도에서도 여성은 제외되었고, 남녀의 임금차별이 합법이었으며, 양성평등을 요구하는 여성은 레즈비언으로 매도당했다. TV와 라디오 방송국은 여성의 목소리는 너무 거슬려서 방송에 부적절하고, 여성이 뉴스를 보도하면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믿었다.

‘미투’ 시대의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은퇴연령인 베이비붐 세대의 여성들은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크고 작은 성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기집애가 시집이나 가지 무슨 공부냐’라든가 ‘여자팔자는 두레박팔자’ ‘여자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아직도 이러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20년 오늘날 여성은 모든 곳에 있다. 대학에서는 여학생이 절반이 넘고, 정치가 기업가 의사 변호사 교수 엔지니어로 활약하는 여성의 숫자는 지난 30년간 크게 늘었다.

현재 미국 연방의석에 선출된 여성은 하원에 101명(23.7%), 상원에 26명(26%), 대법원에는 3명(33%)의 대법관이 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낮은 수준이고, 심지어 르완다, 쿠바, 볼리비아, 아랍에미리트(UAE)보다도 낮다. 이 4개국은 여성이 의회에서 절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나라들이다.

21세기 현재도 미국의 여성들은 동등한 임금, 정치력, 법적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어쩌면 70일 후 최초의 유색인 여성을 부통령 자리에 앉히는 일이 그 중요한 도약이 될 것이다. 미국의 유권자는 여성이 53%로 남성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투표율도 10% 더 높다. 미국 대선에서 중요한 스윙보트를 가진 사람이 여성들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누릴 수 없었던 이 소중한 권리를 반드시 행사하는 것만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정말 먼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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