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오면 누구나 한번은 보고 싶어 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올해는 못 본다고 한다. 코로나 19 여파로 지난 3월12일부터 셧다운에 들어간 브로드웨이는 6월, 9월 재개장을 추진했지만 결국 내년 초로 개개장이 미뤄졌다.
물론 무대에서 배우들이 뺨을 맞대거나 얼굴 마주보며 노래하면서 얼마나 많은 침방울이 분수처럼 튈 것인지, 또 배우 수십 명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날리는 먼지는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객석 멀리까지의 공기 오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 브로드웨이 공연을 볼지 모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독립기념일에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을 TV를 통해 보았다. 2016년 브로드웨이 리처드 로저스 시어터에서의 오리지널 캐스팅 공연이다.
‘해밀턴’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18세기의 실존인물 알렉산더 해밀턴(1757년~1804년)의 일대기이다. 해밀턴은 초대 재무장관으로 현재 10달러 지폐 속 인물이다. 건국과 독립 혁명에 대한 역사를 랩과 힙합을 통해 현대적 시각으로 풀어낸 브로드웨이 최고의 히트작이다.
스토리를 요약하면 카리브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가 된 해밀턴은 17세에 미국 뉴저지주로 이주해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던 중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고 조지 워싱턴을 만난다. 타고난 말솜씨와 실력으로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이 되고 뉴욕 최고 가문의 둘째딸 엘라이자와 결혼한다. 워커홀릭인 그는 여름휴가도 가족들만 업스테이트로 보내고 혼자 뉴욕에 남아 국회에 제출할 재정안을 작성한다.
이때 마리아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그녀의 남편에게 준 돈이 정부 재산을 횡령하고 반역을 꾀한다는 스캔들로 비화하려하자 공개적으로 자신의 외도를 자백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권총 결투를 하다가 죽게 되고 해밀턴은 절망에 빠진다.
해밀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념을 바꾸는 애런 버 대신 토마스 제퍼슨을 지지한다. 해밀턴 때문에 자신이 대통령이 못되고 부통령에 그쳤다면서 버는 결투를 청한다. 조지 워싱턴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큰 해밀턴을 평생 질투하던 버의 총에 맞아 해밀턴은 49세에 사망한다.
‘해밀턴’을 보면서 느꼈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엔 인종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해밀턴 역은 히스패닉 린 마누엘 미란다로 직접 음악과 대본, 가사를 썼고 애런 버 역은 흑인 레슬리 오돔 주니어, 토마스 제퍼슨 역은 흑인 다비드 딕스(미국 드라마 ‘설국열차’ 주연)가 맡아 각각 2016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자주연상과 남자조연상을 꿰찼다.
해밀턴의 처가는 뉴욕주 상원의원 백인 가문인데 아내 엘라이자는 중국계 배우 필리파 수가, 언니 안젤리카 역은 흑인 르네 엘리즈 골즈베리가 맡았다. 미 건국의 주역들이 모두 백인인데 이 백인 캐릭터 역을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안이 맡아 각자 자기가 맡은 캐릭터를 잘 살려 인종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잘 하면 뮤지컬이든 사회든 나라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또 조지 워싱턴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계하라”는 고별사는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다양한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미국을 보여준 ‘해밀턴’이 2015년 개막된 이후 5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행동과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계속 일어나고 있고 전세계 이민자들이 모인 다인종 다양성을 특색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코로나 19 영향으로 주저앉은 경제, 이해관계에 따라 나눠진 정치인들의 심각한 갈등,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불신, 온 나라에 분열만 있을 뿐 어느 쪽도 통합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다같이 힘을 합쳐 코로나를 이겨내야 하는데 퇴보만 하고 있는 지금의 미국이다. 이래서야 언제 질병이 물러나고 마스크를 벗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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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