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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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수확

2020-07-07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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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7일 재택근무를 시작한 이래 넉달 째 집에서 일하고 있다. 출퇴근이 사라짐과 동시에 런치약속, 저녁모임, 각종 공연, 운동클래스가 올스톱 됐고, 캘린더는 몇 달째 깨끗하게 비어있다. 처음 한동안은 곧 살아서 만나자고 농담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너무 힘들고 막막하다며 우울감을 호소한다.

이렇게 오래갈 줄 알았나. 시간이 정지한 것도 같고 달력이 멈춘 것도 같고 그날이 그날 같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보니 날짜 감각조차 없어진 듯하다.

그런데, 그러나, 그래도…


격리생활이 모두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좋다는 사람도 가끔 있다. 잦은 해외출장과 격무에 시달리던 친구는 요즘 숨죽인 채 가만히 쉬고 있다고 했다. 정신없이 굴러가던 바퀴가 억지로 멈춘 덕분에 자기 의지로는 절대 갖지 못했던 휴가를 즐기게 된 것이다. 사회 전체가 다같이 쉬고 있는 이 이상한 시기가 가져다준 의외의 수확이 적지 않다.

일단 시간이 많아졌다: 그동안 다들 너무도 바쁘게 살았다. 시간 없어서 못한다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나. 소소하게는 독서나 영화 또는 음악감상으로부터 옷장정리, 사진정리, 집안청소와 수리 등 오래 미뤄왔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DIY 용품 판매가 증가했고, 이케아(IKEA) 매장은 연일 장사진을 이룬다는 소식이 이를 뒷받침한다.

산책을 많이 한다: 매일 하루 두번, 아침저녁으로 30분씩 걸었더니 몇년 고질이던 불면증이 싹 사라졌다는 친구가 있다. 바쁜 현대인에게 산책은 일상의 옵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락다운 이후 동네 주택가를 걷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그 결과 당연히 건강도 좋아졌을 것이다. 핏빗(Fitbit) 사용자들의 미국 6개 도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미국인들이 팬데믹 기간에 평균 17분 더 많이 자고 수면의 질(REM)도 좋아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돈을 덜 쓴다: 쇼핑과 외식을 거의 안하고 운동과 문화생활을 못하는 탓에 씀씀이가 많이 줄었다. 앞으로 한동안 여행도 못하게 될테니 더 많이 절약될 것이다. 쇼핑 패턴도 많이 변했다. 패션용품보다 편안한 실내복과 운동복, 실내운동기구, 뜨개용품과 원예용품, 도서와 음반 등의 구매가 늘었다는 소식이다. 여성들의 화장품 구매패턴도 달라졌는데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이 급감하고 마스카라 등 눈 화장품은 크게 늘었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면 눈과 눈썹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

식생활이 건강해졌다: 집밥을 많이 먹은 결과다. 투고음식을 사먹는 사람도 많지만 감염 걱정 때문에 단 한끼도 안 사먹는다는 사람도 있다. 자택격리 동안 83% 이상이 집에서 요리를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요리기구와 식재료 판매가 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의 아프지 않는다: 밖에 안 나가고 운전을 안하니 다치거나 사고 날 일이 없다. 손씻기 등 위생수칙을 열심히 지키니 감기 같은 바이러스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 지난 몇달간 병원과 응급실 방문이 현저히 줄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교통사고도 줄고 심지어 범죄율도 하락했다.

옥석이 가려진다: 사람을 오래 안 만나는 동안 내게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저절로 가려진다. 넉달째 안 봐도 전혀 안 궁금한 사람이 있고, 오래 안 만났는데도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있다. 아울러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삶에서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의 순위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넉달이라는 시간은(얼마나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치고, 새로운 취미를 익힐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가 전국의 피아노 딜러들을 취재한 결과 온라인 피아노 판매가 급증했다고 한다. 쇼룸을 닫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연주회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업종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이삼일에 한 대 팔던 피아노(디지털 포함)를 4월과 5월에는 매일 6대씩 팔고 있다는 딜러도 있다. 구입자 대부분이 처음 피아노를 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팬데믹 기간 중 평소 배우고 싶었던 취미생활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집콕 생활 중의 가장 큰 수확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료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무려 60여편의 오페라를 감상했다는 것이다. 극장에서라면 평생 보아도 다 못 볼 진귀한 공연들, 세계최고수준의 메트 프로덕션을 공짜로 편안히 앉아서 보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감사하던지 메트에 기부금을 보냈을 정도다. 풀타임 일을 하면서 꼬박 서너시간 이상 오페라를 감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오늘도 이어폰을 끼고 무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메트(metopera.com)는 매일 다른 오페라를 상영하고 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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