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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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2020-06-30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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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남부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영민한 소녀가 있다. 타고난 승부욕과 성실한 노력으로 수재들만 모이는 휘트니 영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프린스턴을 거쳐 하버드법대를 나와 일류 로펌의 변호사가 된다. 고교 졸업반 때 진학상담사로부터 “네가 프린스턴에 갈 재목인지 잘 모르겠다”는 모멸적인 말을 듣고 깊이 상처받지만, 실력과 오기로 최선을 다해 결국 “본때를 보여준” 여성,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 이야기다.

그녀의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읽었다. 정치인 자서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우연히 지난 5월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그 감상이 책으로 이어졌다.

다큐 ‘비커밍’은 2018년 11월 책이 출간된 후 오바마 여사가 미국 34개 도시를 돌았던 북투어 여정을 기록한 영상이다.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회, 그리고 북사인회의 무대 앞뒤에서 잡힌 진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따스하게 맞이하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통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격려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그녀 앞에서 많은 여성들이 눈물을 터뜨리며 감격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훌륭한 퍼스트레이디였다는 건 알았지만 피상적으로만 접했던 흑백사진이 총천연색으로 채색되는 경험이었다.


562 페이지나 되는 ‘비커밍’을 단숨에 읽었다. 손에 든 책을 한번도 놓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간 일은 정말 오랜만이다. 한편의 베스트셀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흡인력이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구석구석 드러내는 용기, 자아와 세상을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통찰력, 사람들을 묘사하는 따스한 시선, 그리고 품위있는 스토리텔링에 감탄하며 읽었다.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이야기를 다룬 1부 ‘내가 되다’에 이어 2부 ‘우리가 되다’는 1989년 여름에서 시작된다. 하버드법대 졸업 후 시들리 오스틴 로펌의 1년차 변호사로 바쁘게 일하던 그녀에게 한 인턴의 멘토 역할이 맡겨진다. 그 인턴은 입사 전부터 법조계의 파란을 일으킨 흑인 법대생,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지금껏 만난 학생 중 최고”라고 평했다는 청년, 법대 1년생이 벌써 로펌인턴으로 발탁된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상한 이름과 굵직한 바리톤 목소리, 그리고 환한 미소를 가진” 버락 오바마는 그렇게 미셸 로빈슨의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25세의 그녀와 28세의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하버드 동문인데다 당시 로펌에서 일하던 400여 변호사 가운데 흑인은 다섯 명도 안 될 정도로 희귀했으니 만난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는 신선했고, 관습적이지 않았고, 희한하게 우아했다”고 미셸은 회상한다.

그녀는 늘 할일을 계획하고 목표를 산정하며 결과를 분석하는 ‘범생’이었다. 안정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하는 현실주의자, 32세 전에 이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매진하던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돈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이상주의자가 나타났다.

밤새워 정치철학서적과 도시공공주택 정책에 관한 책을 읽는 남자, 가난한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풀뿌리운동을 조직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남자, 데이트 중에도 “자기 무슨 생각해?” 물어보면 “음, 소득불평등에 관해서” 이런 대답을 들려주는 남친…

그의 영향으로 미셸은 로펌을 떠나 공공사업에 투신, 비영리단체를 이끌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여정에 합류하게 되고, 책의 3부 ‘그 이상이 되다’에서는 2009년 백악관에 입성, 제44대 대통령과 영부인으로서 8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커밍’은 평범한 흑인들의 삶을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미국에서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과 선거운동의 과정, 롤러코스트 같은 정치인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리고 사회 각처에서 늘 유일한 여성이고 유일한 흑인이었던 그녀가 두 가지 핸디캡을 극복하고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희망과 가능성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는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미셸과 버락 오바마는 양극화된 미국에서 8년간 우파언론의 숱한 폄하와 공격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남녀 각 1위에 올라있다.

“버락과 나는 우리 존재가 일종의 도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왔다. 많은 미국인이 우리가 백악관에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겼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역행적인 두려움과 분노를 부추기는 자극으로 작용했다. 혐오는 오래되고 뿌리 깊었으며 여전히 위험했다.”

우리가 얼마나 품위 있고 훌륭한 대통령 부부를 가졌었는지 새삼 그립다. 4개월 후면 대선이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을 백악관으로 보내기 위해 반드시 투표해야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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