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코로나 사태가 일깨워준 소중한 것들

2020-04-24 (금) 조환동 부국장·경제부장
크게 작게
미국 온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최근 아내가 머리를 깎아주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비드-19) 사태로 비필수 업종으로 분류된 미용실과 이발소들이 대다수 영업을 중단하면서 결국 아내에게 부탁해 머리를 깎았다.

사실 지난 3월 초 데스크의 창 칼럼을 쓸 때만 해도 코로나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또 다른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였던 2003년 사스나 2015년 메르스 정도로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 전 세계 확진자수와 사망자에서 각각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3일 현재 미국 확진자가 85만6,000여명, 사망자는 4만7,000여명으로 전 세계 확진자의 각각 32%와 25%를 차지하고 있다. 설마설마 했던 것이 현실이 되면서 멘붕이 된 기분이다.


지난 두 달여간 기자는 물론 미국에 사는 우리 모두 다양한 일상을 처음 경험하고 있다. 화장지는 아직도 미국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생활용품이다. 미국에서 화장지를 사기가 이렇게 힘들지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한국이나 유럽처럼 비데가 많이 설치되지 않은 곳이 미국이긴 하다. 급기야 화장지를 구하지 못한 미국인들이 물티슈, 신문, 티셔츠까지 변기에 넣으면서 하수도가 막힌다고 정부가 ‘안내’까지 하고 나섰다. 다행히 최근 한국마켓들이 한국에서 화장지를 수입하면서 남가주 한인들은 최소한 화장지 걱정은 덜었다.

미국 마켓에서 여전히 계란 섹션은 텅텅 비어있다. 여기에 미국인들은 손 세정제, 알콜 소독제도 못 사서 난리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천조국’으로 불리기까지 하는 미국, 내가 아는 미국이 이런 나라는 아닌데 하는 자괴감까지 들 정도다.

식당들이 투고나 배달만 할 수 있으면서 먹을 곳이 없어져 회사 또는 차안에서 매일 점심을 해결한다. 그렇지만 힘겹게 생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인식당들을 돕는데 동참하고 싶어 가능한 한 한인식당에서 투고를 한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퇴근하면 귀가 너무 아프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코비드-19 확산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공중보건 정책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켓이나 은행 등 어디를 가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교회를 비롯한 대다수 교회와 성당은 일제히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최근 두 달간 기자가 아는 세 분이 돌아가셨는데 제대로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지금도 한인을 비롯한 많은 노인들이 가족들의 방문이 금지된 양로병원에서 외롭게 별세하고 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새 출발을 하는 젊은이들은 하객들이 참석한 결혼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샵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장례식에서 고인의 유족들과 슬픔을 나누고, 결혼식에 가서 함께 축하할 수 있는, 예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당연시하게 여겼던 소소한 일상들이 이렇게 소중한 것인지 몰랐다.

그나마 출퇴근은 물론 평소에도 차량이 없어 트래픽이 없다는 점, 개솔린 가격이 3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공기가 맑아진 점은 자그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마스크를 쓰면 병자 취급을 받던 미국에서 이제는 마음 졸이지 않고 ‘당당하게’ 마스크를 쓸 수 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에서 최대 한인사회가 형성된 이곳 LA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남가주 한인사회는 한인이 운영하는 마켓과 은행, 식당, 미용 등 모든 업종, 또 다양한 한인 봉사와 전문직, 친목단체들이 있다.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보험·재정전문가 등 한인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이 있다. 특히 미주 한인사회는 중국 커뮤니티 다음으로 자체 금융권이 잘 발달돼있다.

코비드-19 사태를 맞아 이들 전문직 종사자들과 봉사단체, 한인 금융권은 우리에게 큰 버팀목이다. 영어를 잘 못해도 한인 은행이나 LA 한인회 등 봉사단체, 공인회계사 등을 통해 다양한 혜택들에 대한 정보와 신청절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한 정보제공도 활발하다.

분명 아직 어려운 상황이지만 영업 완화 등 경제 재가동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고 코로나 감염 확장세도 조만간 정점을 칠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19세기 말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의 “괴로운 시련처럼 보이는 것이 뜻밖의 좋은 일일 때가 많다”는 격언이 문뜩 생각났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기회가 있을 수 있고 또 막다른 길에 서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코로나 사태가 우리 모두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조환동 부국장·경제부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