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301) 제44대 Barack Obama 대통령 (1)

2020-04-06 (월) 조태환/ LI 거주
크게 작게
Judeo-Christian 전통을 따르는 서양인들은 “7” 이 운수가 좋은 숫자이고 “13”은 불운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기피하려고 한다. 극단적인 예로는 Elevator 의 층계번호중에 아주 “13”번을 쓰지 않는 건물도 흔히 있다고 한다.

우리민족은 오래전부터 “석3”를 선호해왔던것 같다. 같은 한문자를 쓰는 중국인들과 우리민족은 “사” 라는 발음때문에 “4” 라는 숫자를 최대한 기피한다. “사층,” “사번,” “사대” 등은 다 께름직한 숫자들인데 아마도 만일 무슨 추첨에서 “44”가 뽑혔다면 “아이고 죽었다, 죽었어!” 라고 기가 죽은채로 자탄하기 쉬울것이다. 하필이면 “사사”대 일까! 우리식으로 치면 사주가 좋지 않은 순번이다.

그러나 “궁합”이 맞아야만 남녀가 사이좋은 부부가 된다는 말이 허황된 소리인것처럼 Barack Obama 대통령은 “44대가 어때서?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라는듯이 끊임없는 보수, 인종차별주의, 백인우월주의, 저교육, 부유층, 공화당의 시달림 속에서도 충실하게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잘 마추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Obama 는 Bush 43 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고의적인 도전이 없이 반대론자들을 온화하고 때로는 대학교수같은 어조로 설득하려고 해온것이 그들을 더욱 화가나게 하고 강경하게 만들었었던듯도 하다. 결과적으로 그의 대통령임기중에 미국의 국론은 근래의 어느때보다도 심각하게 분열되었었고 Donald J. Trump 아류의 저급 정치인들이 동물적본능을 자극하는듯한 저질의 선동으로 악용할수 있도록 변질되었었다.

Obama 는 여러가지 점에서 “최초”이자 탁월했던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흑인 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흑인들이나 소수민족의 입지향상 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가난하고 힘이없는 모든 국민들의 처우개선에 대통령의 정치력을 동원하였었다. 그는 강경한 대중동정책을 계속하면서도 Israel 의 지나친 과격한 행동에는 적절한 경고를 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정치자금도 없고 초선 상원의원이란 경력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쉬지않고 날라서 백악관에 들어갔다.
Obama 는 미국 대통령중에서 아마 가장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역경을 다 극복하였고 자신이 체험한 어려움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 주려고 노력하는 정치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대통령선거 운동중에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에 수천만명의 중산층이하의 국민들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것이 미국의 수치라고 역설하였었다. 대통령 취임후 소위 “Obamacare” 라고도 불리우는 건강보험제도를 입법하여 많은 국민들이 보험에 가입할수 있도록 하였다.

Obama 는 이 “새보험으로 반드시 보험에 가입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병도 치료 받을수 있어야 하고 치료를 받을때에 보험가입자가 부담해야 하는 액수가 많지 않아야 하며 직장을 옮겨도 보험이 유지될수 있어야 한다” 는 규정이 꼭 들어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었다.

Obama 의 모친은 직장에서 가입한 건강보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궁암등으로 사망하면서 보험의 여러가지 제약때문에 만족스러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의료비 때문에 생긴 부채를 갚아가면서 사망한 뼈아픈 경험을 하였었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경험이 그에게 Obamacare 의 입법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Obama 는 자신의 표현대로 “칠흑같이 검은 피부를 가진 아버지와 우유처럼 흰피부를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의 Deep South 에서는 혈액의 16분지 1” 이 검으면 “흑인”이라고 차별해 왔었는데 자그만치 절반이 검었던 “흑인” Obama 는 출생이후 계속 백인사회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어려서 부터 인종차별에서 오는 갈등속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백인들과의 교제방법은 배웠었겠 지만 그는 동시에 소외감과 외로움도 많이 경험하면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Obama 의 부모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인것 같은데 두 사람 다 결혼생활들은 억세게 불운한 사람들이었다. 부친은 모두 다섯번 결혼을 하였었고 모친도 네번이나 결혼을 하였었다.
Obama 는 그가 두살때에 부모가 이혼을 하였던 까닭에 생부와는 같이 살아보지 못한 셈이고 그가 열살때에 부친이 찾아와서 한달여를 같이 보내는동안 jazz 음악회도 같이 같었고 부친이 농구공도 하나 사 주었었는데 추후에 그는 jazz 를 좋아하였고 농구를 잘 하였었다고 한다. 그는 부친을 몹씨 그리워 했었던 까닭이었던지 그의 회고록의 제목이 ”Dreams from My Father” 이었었다고 한다. 그는 부친을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으며 그가 20대 초반에 Kenya 를 방문하여 그의 여러 이복형제들을 한번 만나 보았다고 한다.


2016년의 공화당의 대통령후보 공천대회때에 Texas 의 Ted Cruz 상원의원은 경쟁자인 Donald J. Trump 를 “병적인 거짓말쟁이” (pathological liar) 이라고 비난하였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필자도 1980년대에 Trump 의 허풍에 넘어가서 Atlantic City 에 있는 Trump 의 casino 주식을 조금 샀었다가 그 회사가 파산을 해버렸던 까닭에 손해를 보았던 적이 있다.
Trump 의 허풍과 거짓말은 몇십년간 계속된 것으로 사실상 그의 net worth 가 얼마나 되느지는 들쳐봐야 알수 있을것이다. 2008년의 대선때에 Trump 는 Obama 의 middle name 이 Hussein 임을 들먹이며 그가 Moslem 이라고 주장하고 그가 미국내에서 출생하지 않았음으로 대통령 출마자격이 없다고 떠들고 다녔었다. 후일 Trump 는 Obama 가 Hawaii 출생임을 알고 있었으나 Obama 부친이 Moslem 이었던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모략을 했었노라고 본인이 술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Obama 의 부친 Barack Obama, Sr. 는 18세에 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두고 아내가 임신을 한 처지인 23세때에 장학금을 받고 1959년에 경제학 학사 공부를 위하여 University of Hawaii 에 유학생으로 왔다. 1960년에 Russia 어 과목을 수강하던 중에
Ann Dunham 을 만나게 되었고 본처와는 이혼을 하였노라고 속이고 Obama 를 임신한채로 두사람은 1961년에 결혼을 하였다. 본처에게는 두번째부인을 (Kenya 에서는 허용되는 제도였던 것이었던지)얻는 것이라고 속였었다고 한다.

Obama 가 두살 되던때인 1964년에 두사람은 이혼을 하였고 Obama Sr. 는 일본계 여인과 또 결혼을 했다가 또 이혼을 하였다. 그는 1964?년에 장학금을 받고 Harvard 대학교의 경제학 박사학위 공부를위해서 Cambridge 로 갔다. 그곳에서 유태계 사업가의 딸과 교제를 했었다. 성적과 학비문제가 다 여의차 않아서 경제학석사 학위만 받은채로 Kenya 로 돌아 갔었는데 유태인 여성이 Kenya 로 찾아와서 결혼을 한후 자녀 두명을 두었으나 또 이혼을 하였다.

Obama, Sr. 는 Kenya 정부에서 경제분석가 등으로 일하였었는데 그는 Kenya 가 사회주의정책을 쓰는것에 반대하여 언론에 글을 올렸었고 그런것들이 Jomo Kenyatta 대통령의 눈에 거슬려서 관직에서 몰려난후 다시 취직을 못하는 어려움도 겪었었다고 한다. 그는 Kenya 여성과 다섯번째로 결혼을 하였는데1982년에 교통사고를 두번 당하여 사고때마다 한쪽다리를 절단하는 불운을 겪고 있던중 또 세번째 교통사고가 나서 사망하였 다고 한다. 그는 대인관계가 부드럽지 않았었다는 얘기도 있고 말년에는 alcoholism 으로 시달렸었다고 한다. Obama 에게는 여섯명의 부계 이복형제가 있다고 한다.

<조태환/ 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