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탄생’
2020-03-24 (화)
이덕규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어
먹이사슬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나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어 간신히 동물이다
태어나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짧은 수명에
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일설에,
허공을 떠도는 맹수 중에
가장 추하고 험악한 짐승이 일 년 중
마음이 맑아지는 절기의 한 날을 가려
낳는다고 한다 사선을 넘나드는
난산의 깊은 산통 끝에
온통 캄캄해진 몸으로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을 낳는다고 한다
풀잎 휘어지게 앉아 있으니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수죠. 항문도 내장도 생식도 없지만 불구가 아니라 온전하죠. 불멸의 미신에 사로잡히지 않으니 눈 깜박할 사이에 떨어져도 미련 없죠. 오, 나의 어머니가 맹수인 걸 눈치 채셨군요. 가장 추하고 험한 짐승일지라도 제 안의 자욱한 슬픔에 눈감을 때 나는 그 속눈썹에 매달리죠. 때로 어둡고 막막한 길 걷는 당신, 흐린 동공을 씻어 세상을 투명하게 비춰주죠.
반칠환 [시인]
<이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