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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담담하게 맞는 실력

2020-03-12 (목) 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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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라는 유행병이 온 지구를 난폭하게 휘젓고 돌아다닌다. 그 가운데 중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에서 무서운 저승사자 노릇을 해대고 있다. 게다가 다음은 미국차례인가 보다. 아니, 이제는 지구적 대재난이 급속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 조그만 지구 위에 어디인들 안전한 피난처가 있을까.

이러다가 코로나19가 지구 위에서 사람의 씨를 싹 말려놓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치료약이나 완치의술은 언제 실용화되나. 그 일에 불철주야 머리 싸매고 헌신하는 분들과 환자 치료에 고생하는 분들에게 우선 큰 격려박수 보낸다.

아무튼 문제의 본질은 이 같은 죽음의 폭풍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절박함으로 요약된다. 그걸 뒤집으면 어떻게 해야 죽음의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다. 아니, 과연 죽음의 문제를 그처럼 간단하게 해결할 수는 있는 비법이 있기는 있을까. 쉽지 않지만 희망을 가져보자.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지 않던가.


인류의 온 문명은 바로 삶과 죽음, 특히 궁극적인 삶과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의 문제도 똑같다. 셰익스피어도 명작의 주인공 햄릿의 입을 통하여 ‘사느냐 죽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외쳤다.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삶과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학문인 철학, 그리고 온 인류문명의 본원인 종교는 이 생사의 문제 해결을 핵심 삼고 있다.

교회 담임목회를 할 때 신앙특수훈련 프로그램을 여러 해 실시했었다. 3박4일 동안 전화도 끊고 시계도 차지 않고 성경공부와 기도에만 전심했다.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금식도 해가면서 체험으로 배웠다. 그 프로그램의 최절정은 ‘십자가대행진’이었다. 참석자들이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한 시간 정도 산 정상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 다음 십자가를 땅에 내려놓고 ‘관 속에 들어가서 10분간 누워있기’에 참가한다. 담임목사인 내가 첫 시범을 보였다. 그 프로그램 할 때마다 한 번씩 했으니까 수차례 관 속에 들어가 누워있는 체험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돌무덤 매장, 부활을 자기화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함께 모여 간증을 나눈다. 눈물 콧물 모두 쏟아내며 교회 언어로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된다. 필자의 경우, 관에 눕자마자 안내원 두 사람이 뚜껑을 덮고 못질을 했다. 그 못질 소리에 공포심이 몰려왔다. 만약 지진이라도 나서 이 토굴이 무너지면....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도 지진이 있었다. 특히 남가주지역은 큰 지진이 몇 번 있었지 않나. 만약 지진이 나면 토굴이 무너지고 나는 관 속의 시체로 남게 된다. 어찌 공포심이 없겠는가.

그렇게 여러 번을 했는데도 할 때마다 또 겁을 먹곤 했다. 신자들 앞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결코 즐겁고 행복한 체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 그 ‘관속에 10분간 누워있기’가 나 자신의 죽음 공포심을 현저하게 줄여주었다. 아직도 죽음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수준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실존적인 고백을 하셨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사형집행을 면제해달라고 읍소하신 것이다.

코로나19의 지구적 재앙이 좀처럼 쉽게 수그러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예방백신이나 치료약이 며칠 안에 온 지구에 보급될 것 같지도 않다. 설혹 치료법과 특효약이 개발되었다 해서 온 인류 죽음의 문제가 모두 속 시원히 해결될 것도 아니다. 차라리 이번에 온 인류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실력, 그거 하나 확실하게 키운다면 어떨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결국 죽고 말 것인데....

<이정근 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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