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태빈 저 ‘항일답사 프로젝트-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를 읽었다. 독립운동의 주된 무대였던 중국의 항일 답사 지역을 직접 탐방하고 쓴 글이다. 작가는 “역사는 또 다른 미래이다. 수십년 헤어져 살아온 남북한 동포 모두가 기꺼이 자랑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건 항일 투쟁사이다. 북으로 뤼순, 다롄, 명동, 용정을 거쳐 하얼빈에 이르렀고 남으로는 난징, 상하이, 자싱을 두루 살폈다. 거점인 베이징에 오래 머물며 충칭, 타이항산, 옌안으로 떠날 날을 손꼽다 훌쩍 떠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메아리치는 항일의 노래에 참담해 울고, 안타까워 울고, 억울해 울었다. 그 중 부끄러움의 눈물이 가장 많았다고 고백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신념아래 자신의 몸과 마음은 물론 가족까지 희생한 그들의 노고를 우리는 알고 있다. 쓸쓸한 인생이야 말해 무엇 하랴. 고생스럽고 힘들어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여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눈물이 아닐 터, 작가는 무엇이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렸을까 궁금했다.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여 200여년간 착취했고 프랑스는 19세기 중엽부터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하여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서야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이 독립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독일 모두 수십년 이상 식민지를 착취했었다.
한국은 고조선시대부터 5,000년 역사동안 강대국의 침략을 늘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나라와 정신을 지켜왔다. 일제 식민지로 36년을 보낸 적은 있지만 이때도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끊임없이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기에 우리의 자주 정신은 잊어버린 적이 없다.
미국에 사는 이민자인 우리들은 한국에 가면 샤핑하고 친구 만나고 놀러 다니기 바쁘다. 유적지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일은 드물다. 그렇다고 뉴욕과 뉴저지를 비롯 미국 내에 독립운동 사적지가 있다고도 생각 못한다. 관심을 갖고 보면 의외에도 동부와 서부에 유적지가 제법 많다.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책에는 김구 루트, 임정요인 루트, 이회영 루트, 이육사 루트, 안중근 루트, 윤동주 루트가 소개되어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찾아보는 길이다.
먼저 서재필 로드를 짚어보자. 서재필이 의사 공부하던 워싱턴DC, 1919년 3.1운동 후 4월16일 큰 태극기를 앞에 들고 한인들이 행진하고 필라델피아 경찰 기마대가 호위하던 도로, 1925년부터 필라에 정착하여 문구류 비즈니스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 다시 메디아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 집도 있다.
이승만 로드를 살펴보면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뉴저지 프린스턴, 청년 이승만이 조국의 독립을 청하러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찾아간 뉴욕 사가모어 힐, 기독학원을 운영했고 대통령 하야 후 말년을 보낸 하와이 등등 발자취를 남긴 곳이 많다.
물론 서부 지역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도산 안창호의 사적지는 너무 많고 널리 알려져 있다. 멀리 있는 한국이나 중국의 독립운동가 로드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독립 유적지부터 방문해보자.
1921년 3.1절 기념식을 연 맨해튼 타운홀(43가와 브로드웨이 교차로 부근), 조선최초 사절단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워 21대 대통령을 만난 전 5번가 호텔(23가와 5애비뉴), 1920년대 후반 북미대한인유학생 총회 동부대회가 열린 인터내셔널하우스, 독립운동의 산실인 맨해튼 115가 뉴욕한인교회 등등이다.
후손들에게 우리나라는 고유의 독립국임을 선언한 3.1정신에 대해 알려주고 동부와 서부를 잇는 유적지 탐방이나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민 1세대는 2세들에게 뿌리찾기 교육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훗날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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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