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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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의 계절

2020-02-06 (목) 김효선 칼스테이트 LA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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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하얗게 눈 덮인 아름다운 정경을 따스한 LA의 프리웨이를 달리며 바라보는 것은 행복감에 신비함을 더해준다.

눈을 좋아하는 나는 LA로 이사를 오자마자 제일 먼저 스키 탈 곳을 찾았고,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두 시간 정도 가면 만나는 빅베어 스키장에서 장애인 스키 프로그램의 자원봉사자로 겨울을 지내곤 했다.

나는 왼쪽 발을 벨크로 끈으로 오른쪽 부츠에 고정하고 한 다리로 타는 방법인 쓰리트랙(Three Track)으로 스키를 탄다. 험한 블랙다이아몬드 코스까지 내려오며 신이 나게 타다보면 가끔 왜 한 다리로 타느냐고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는 젊은 학생들을 만난다. 농담 삼아 진담 삼아 한 다리로 스키를 타면 균형 잡기가 훨씬 쉽다고 알려주었다. 조금 지나 주변을 보니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이 모두 다 한 다리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들과 어울리며 경쟁적으로 스키를 타며 즐거운 하루를 지내곤 했다.


처음 스키를 타게 된 동기에는 좀 슬픈(?) 사연이 있다. 한국에 스키 붐이 일던 80년대 초에 동료 교직원들이 주말 스키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평소에 무슨 일에든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내가 그들에게는 고민덩어리가 된 것이었다. 자신들의 생각으론 일반인에게도 힘든 스키를 내가 절대 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들은 나 몰래 주말 스키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는 스키여행을 다녀온 동료들이 서로 주고받는 뒤풀이를 듣게 되었다. 그 내용에는 내가 은근하게 마음에 품고 있던 동료가 몰래 간 그 스키여행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고, 그 후 그는 그 인연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스키를 탈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바뀌는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내 마음은 씁쓸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큰 아픔은 평소에 장애가 없다며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만 같던 동료들의 마음속에 깊이 존재하고 있던 나의 장애와 스스로 스키를 탈 수 없는 장애를 가졌다고 느끼던 내 마음이었다.

미네소타의 유학 생활 중에 장애인 스키 프로그램을 처음 접하던 순간 내 가슴은 흥분으로 뛰기 시작했다. 장애인 스키에 참여한 첫날 나는 스키를 꼭 배워야 한다는 집념으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하였고 자원봉사자들이 오히려 나를 우려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스키를 배우고야 말았다.

결국 그날 오후에 나는 리프트를 타고 산위에 서서 아래로 하얗게 펼쳐진 스키코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진정으로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장애이고, 어떻게든 도전을 통해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될 때 진정으로 내 장애가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마자 낮에 있었던 벅찬 가슴속의 전율을 ‘특수체육’이란 책에 담아냈다. 그후 그 책은 한국에 막 생기기 시작한 특수체육과에 첫 교재가 되었다.

결국 함께하는 사회에서 비장애인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자신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어떻게 변형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고, 장애인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자신들이 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그 참여에 필요한 변형방법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스키를 탈 수 있게 도와주는 빅베어 마운틴의 스키 프로그램(accessiblity@bbmr.com)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만끽해보면 좋겠다.

<김효선 칼스테이트 LA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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