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권력의 개들

2020-02-0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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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맞아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요즘 인기다.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이 벌어지기 전 40여 일 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개봉 11일째를 맞아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와 김재규, 차지철과 김형욱을 연기한 네 배우의 뛰어난 연기다.

박정희는 ‘용인술의 귀재’라 불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 그 용인술이라는 게 별 게 아니다. 부하 중 하나를 골라 각별히 신임하는 척한 후 악역을 맡긴다. 그 부하는 물불 가리지 않고 온갖 짓을 다한다. 일이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면서 차갑게 내친다. 밀려난 부하는 분노에 떤다.

이 영화에서 이를 처음 경험한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다. 3선 개헌을 관철하라는 명을 받은 그는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잡아들여 무자비한 고문을 퍼붓는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박정희 말만 믿은 것이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상을 기대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책망과 여론이 나쁘니 잠시 나가 쉬고 있으라는 해임 통고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까지 다 내놓으라는 말과 함께. 김형욱이 배신에 치를 떤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당한 것은 김재규였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김형욱, 이 배신자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은 후 전과 똑같이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그를 신임하는 척한다. 가뜩이나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김재규는 결국 김형욱을 죽이고 박정희의 환심을 사려하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이미 끝난 인간 뭐 하러 제거했느냐”는 책망과 함께 김형욱이 가지고 간 돈을 찾아내라는 어이없는 명령이었다.

거기다 자기를 두고 “친구도 죽인 놈이야”라는 박정희의 말을 엿듣게 되자 김재규는 전에 김형욱한테 들었던 “너도 나처럼 당한다”던 말이 떠오르고 김영삼을 제명하면 안 된다는 자기 말은 묵살당하고,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는 차지철이 총애를 받자 박정희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권력의 주변에는 권력에 충성하며 호가호위하는 권력의 개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한 때 자신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믿고 떵떵 거리지만 착각일 뿐이다. 권력자에게 용도폐기 판정을 받는 순간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권력자도 마찬가지다. 부하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오히려 이들에게 이끌려 잘못된 길로 가거나 이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박정희만이 아니라 이승만도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권력을 오래 유지하려던 이기붕과 최인규 같은 자들 때문에 4.19 혁명으로 하야하는 비극을 자초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사실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위대한 한국국민은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승만을 몰아냈고,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박종철을 고문 치사한 전두환 일파를 단죄했다.

1987년 국민항쟁으로 민주화가 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권력의 속성은 변함이 없다. 그 주변에는 권력자에 충성하고 국민을 배신하려는 세력이 늘 꼬이게 마련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의 친구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공작한 청와대 보좌관들에 대한 수사를 계속하자 추미애는 그의 수족을 자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에도 윤 총장은 청와대 비서관 등 13명을 전격 기소했다. 이들이 죄를 저질렀는지는 향후 재판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추미애가 임명한 검사들도 문재인의 경희대 후배인 이성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했다니 아무 근거 없이 하지는 않은 듯하다.

선거부정이 사실이라면 이는 집권자를 뽑는 전권을 가진 국민의 주권을 침탈한 국기 문란이며 국정 농단이다. 윤석열의 팔다리를 끊는 것으로 이를 덮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착각이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런 전두환 때도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을 덮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이랴.

권력은 쥐고 있을 때는 영원할 것 같고, 그 때문에 김재규보다는 차지철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이 몰락하는 이유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남산의 부장들’은 권력의 개들은 결국 개 같은 최후를 맞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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