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모카(MOCA)가 문을 활짝 열었다. 지난 토요일 대대적인 축하행사와 함께 LA다운타운 두 곳에 있는 전시관의 입장료(15달러)를 무료로 전환한 것이다. 작년 5월 캐롤린 파워스 이사장이 1,000만달러를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이로써 모카는 게티 뮤지엄, UCLA 해머 뮤지엄, 더 브로드에 이어 남가주에서 무료입장할 수 있는 주요 미술관의 하나가 되었다. 한인타운 인근의 마르시아노 미술관 역시 무료였으나 작년 11월 갑자기 폐관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LA 미술계에서 굉장히 큰 뉴스였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유료인 주요 미술관은 이제 LA카운티뮤지엄(LACMA) 하나 남았다. 입장료가 20달러인 라크마에 대해서도 무료 개방하라는 압력이 있지만 당분간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모자라는 건축예산 모금에만도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가주 주민들은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 현재 미국 내 무료 뮤지엄은 32%(미술관관장협회 자료)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은 대부분 유료다. 예를 들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휘트니, 모마, 구겐하임과 시카고, 보스턴, 휴스턴,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뮤지엄들은 모두 25달러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게티와 더 브로드, 모카와 해머 같은 훌륭한 미술관들을 아무 때나 가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무료입장은 뮤지엄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는 것이다. 입장료가 없으면 남녀노소, 수준과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된다. 20달러 정도의 입장료가 비싸서 미술관에 안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지만 무료가 되면 미술에 관심 없던 사람들조차 부담 없이 찾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커뮤니티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어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미술관이 공공기관이 되는 것이고, 귀중한 아트 콜렉션 역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공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뮤지엄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큰 변화다.
모카는 사실 대중적인 미술관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르네상스, 인상주의, 표현주의 그림들이 아니라 2차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컬렉션이 7,000여점이나 되고 연중 중요한 기획전이 많이 열리는데도 일반인의 발길이 뜸한 이유가 바로 감상과 이해가 어려운 컨템포러리 아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더 브로드 역시 현대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2015년 새로이 문을 열었고, 눈길 끄는 건축물에다 막대한 자금력이 동원된 마케팅도 한 몫 하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 무료이기 때문임은 자명하다.
모카로서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료입장 정책을 실시하면 회원제(membership)의 의미가 거의 없어지기 때문이다. 보통 뮤지엄들은 무료입장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멤버십 제도를 운영한다. 그러니 입장료가 없어지면 멤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2014년 무료입장으로 전환한 해머 뮤지엄의 경우 첫해 회원이 9%가 줄어서 멤버십 수입이 11% 감소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방문객은 25%나 늘었다.
모카의 멤버십에서 나오는 수입은 연 50만달러 정도, 입장수입은 운영예산의 7% 정도를 차지해왔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2018년 기준 28만여명이던 방문객은 올해 약 7만명 가량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더 브로드를 관람한 사람의 상당수가 길을 건너 모카도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대의 예술을 다루는 이런 미술관들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다는 것은 도시의 문화수준 자체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한편, 무료입장보다 더 고마운 것은 모카의 회생이다. 10년 넘게 심각한 재정난과 운영위기를 겪어온 과정을 미술계는 오랫동안 봐왔기에 지금의 건강한 회복이 그저 놀랍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1983년 개관한 모카는 빠른 시간 내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으로 성장했으나 만성적자에 시달리다 2008년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일라이 브로드가 지원한 3,000만달러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이후에도 관장, 이사회, 큐레이터 간의 마찰로 소모전이 계속돼 때마다 라크마 합병설이 나올 정도로 내적 진통이 심했다.
그랬던 모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2018년 새 관장 클라우스 비젠바흐가 부임하면서부터다. 많은 쇄신과 변혁이 조용히 이루어지더니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작년 말에는 한인 권기홍·원미 부부 이사가 500만달러를 기부, 공연예술실험 프로젝트인 ‘원미의 창고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이다. 지금은 한국계 아티스트 갈라 포라스-김의 기획전(Open House: Gala Porras-Kim)이 5월11일까지 열리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와도 더 많이 소통하는 현대미술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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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