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워런의 추락

2019-12-03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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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몬트(Vermont)는 프랑스 말로 ‘초록색 산’이란 뜻이다. 초기 이민자 중에 프랑스계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주에 있는 가장 큰 산이 ‘초록색 산’(Green Mountain)이고 이 주의 별명도 ‘초록색 산 주’다.

이 주는 인종적으로나 경제 수준으로나 동질성이 강하다.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고 극빈자나 억만장자가 거의 없어 사는 형편이 비슷하다. 전 주민 의료보험제가 실시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주 출신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이 미 정치인 중 제일 먼저 전 국민 의료보험제를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1년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주지사에 당선된 피터 셤린은 전 주민 의료보험제인 ‘초록색 산 케어’(Green Mountain Care)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 최초로 전 주민의 건강을 주정부가 책임지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3년 뒤 셤린은 이 제도의 폐기를 공식 선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셤린 팀은 그 동안 전 주민 의료보험제 실시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14가지 방안을 연구했다. 이 제도 시행에 첫 해는 43억 달러, 2020년에는 50억 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추산됐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대적인 증세가 불가피하며 이를 강행할 때 중소 자영업자들의 파산과 대기업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버몬트 경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직면할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버몬트 같이 작고 인구구성이 동질적인 주조차 전 주민 의료보험제 실시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 제도 시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시사한다. 현재 미국민 중 1억5,000만 명은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들고 있고 대체로 이에 만족하고 있다. 개인보험이 없어지고 정부보험이 유일한 의료수단이 될 경우 대대적 혼란이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전 국민 의료보험제인 ‘모든 사람을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가시행될 경우 10년간 30조에서 35조 달러에 달하는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결국 이 돈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유럽 각국의 세율이 미국보다 훨씬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율이 높을 뿐 아니라 그 적용대상은 억만장자가 아니라 중산층부터 시작된다. 월스트릿 저널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연소득 12만 달러 이상의 가정은 소득의 42%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미국은 같은 수준의 소득에 적용되는 세율이 22% 불과하다. 스웨덴의 경우는 연소득 4만7,000달러만 돼도 55%의 세율이 적용되고 영국은 6만4,000달러부터 4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들이 중산층에 이처럼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에 대한 중과세 없이는 높은 수준의 복지혜택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여기다 거의 모든 물품에 21%의 부가가치세를 부과하고 있다.

한때 민주당 대선 후보 가운데 선두로 올라섰던 엘리자벳 워런 연방 상원의원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다. 워런은 샌더스와 함께 전 국민 의료보험제의 강력한 지지자다. 그의 인기가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이 제도의 구체안을 공개하면서부터다. 워런과 함께 이를 지지하는 샌더스는 구체안을 내놓지 않은 채 중산층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워런은 10년간 전 국민 의료보험제 실시에 필요한 예산을 20조 달러로 잡고 있는데 이것부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거기다 워런은 중산층 증세 없이 억만장자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대부분 국민이 불만이 없는 개인 의료보험을 없애겠다는 것도 유권자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고 있다. 이렇게 되자 워런은 개인보험 폐지는 유예기간을 두겠다고 했지만 이는 전 국민 의료보험 즉각 실시를 원하는 민주당 좌파와 중도 유권자들 모두의 반발을 사고 있다.

2020년 예선이 처음 시작되는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워런이 무명인사나 다름없던 피트 부티지지에 10% 포인트나 밀리는 것은 상당부분 이 때문으로 봐야 한다. 물론 아직 대선 초반이라 지지순위는 바뀔 수 있겠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에 관한 워런의 입장은 민주당 경선이나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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