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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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 안은 그 강, 숱한 시를 품고 유유히 흐르네

2019-10-11 (금) 칠곡=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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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방어 전투’ 격전지 칠곡 왜관읍

전쟁의 상흔 안은 그 강, 숱한 시를 품고 유유히 흐르네

호국의 다리는 2011년 6월 25일 새벽 홍수로 상판 일부가 무너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다리 건너편은 옛 왜관이 있던 약목면 관호리다.

전쟁의 상흔 안은 그 강, 숱한 시를 품고 유유히 흐르네

야간 조명이 불을 밝힌 ‘호국의 다리’. 새벽부터 밤까지 등하교하는 학생과 산책하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의 상흔 안은 그 강, 숱한 시를 품고 유유히 흐르네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실성당.



본격적으로 왜관 읍내를 둘러보기 전‘한미식당’에서 돈가스를 시켰다. 큼지막한 고깃덩어리가 접시를 포개듯 덮어 밥과 샐러드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볼록해진 배를 쓸어내리며 식당을 나서다가 안내문에 눈길이 갔다. 미군인 빅 존스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만든 수제 햄버거가 대표 메뉴라는 내용이다. 이런, 들어갈 때 봤어야 하는 건데. 빅 존스는 식당 사장 유건동씨의 매제다. 왜관은 미군과 뗄 수 없는 도시다. 주한미군 군수지원단을 주축으로 한‘캠프캐럴’이 읍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후문 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클럽과 식당 등이 영어 간판을 달고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작은 이태원이라 불러도 될 수준이다.

한국전쟁의 치열한 상흔 ‘호국의 다리’


칠곡의 군청 소재지인 왜관은 예부터 국제도시였다. 요즘처럼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을 때마다 지명 때문에 눈총을 받는다. 왜관(倭館)은 조선시대에 왜인들이 머물면서 외교나 무역을 하는 관사가 있던 곳이다. 공식적으로 왜관이 설치됐던 부산포와 진해 내이포(제포), 울산 염포에도 지워진 그 이름이 유독 칠곡에만 남았다. 실제 왜관은 지금의 왜관읍에서 낙동강 건너편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는데, 1905년 경부선 철도 ‘왜관역’이 들어서면서 지명이 굳어졌다.

왜관은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55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연합군과 인민군 수만 명이 사망한 낙동강방어전투의 상징적 장소다. 세계전쟁사에서 빠지지 않는 지명으로, 한국보다 외국에 오히려 더 알려져 있다. 지명을 바꾸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지만 함부로 고치지 못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도 한몫하고 있다.

왜관 읍내 북측 끝자락에 약목면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세 개 있다. 상류에서부터 경부선 열차가 다니는 복선 왜관철교, 차량이 이용하는 왕복 2차선 왜관교,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 옛 왜관철교가 낙동강을 가로지른다. 옛 왜관철교는 현재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등하교하는 학생들, 시장과 군청에 볼일이 있는 주민들, 운동하는 시민과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닥에는 우레탄 재질의 합성 고무를 깔아 폭신폭신 걷기 편하다. 다리 아래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하늘색 페인트를 칠한 철골 트러스 사이로 강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온다. 가을날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다리다.

호국의 다리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1905년 개통한 경부간 군용철도의 교량으로 처음 세워졌고, 1941년 상류에 복선 철교가 완공된 뒤부터 사람과 차가 함께 이용하는 인도교가 됐다. 다리의 운명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바뀌었다. 김천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국도에서 낙동강을 건널 유일한 인도교인 이곳을 이용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7월 말에는 그 수가 하루 2만5,000명에 달했다. 대구와 부산이 함락될 위기에 놓인 8월 1일, 연합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민군과 격전을 벌인다. 물밀듯이 치고 내려오는 적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은 3일 왜관 전 주민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그날 오후 8시30분 인도교를 폭파한다. 왜관 쪽 둘째 경관 트러스와 상판이 무너져 내리면서 길이 469m 중 63m가 끊어졌다.

도하가 불가능해진 인민군은 강 서편에 집결하고 연합군은 강 동쪽 왜관에 진지 구축을 완료했다. 끊어진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가 계속되던 8월 16일, 미군의 B29 폭격기 98대가 적 주둔지에 26분 동안 960톤이나 되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세계전쟁사는 이 융단폭격으로 인민군 4만명 중 3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포항~왜관~마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방어전투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 이후인 9월 23일까지 지속됐다.

폭파된 다리는 그해 10월 총 반격 때 침목 등으로 긴급 복구한 이후 다시 인도교로 활용됐다. 철도청은 1979년 11월 안전을 고려해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철거를 검토했으나, 호국의 상흔을 간직한 다리를 보존하자는 군민의 뜻을 모아 칠곡군이 관리권을 이양받았다. 1년 6개월 간의 복구 공사 끝에 인도교는 1993년 2월 ‘호국의 다리’로 다시 개통했다. 그러나 왜관의 상징이자 칠곡의 자부심인 이 다리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1년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에 약목면쪽 상판과 트러스가 떠내려간 것이다. 그날이 하필이면 6월 25일 새벽이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역사의 우연치고는 너무나 절묘한 시점이라 칠곡 군민으로서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린 사건이었다.

호국의 다리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옛 왜관터널로 연결된다. 다리와 함께 1905년 경부선 철도로 만들어진 터널이다. 길이 80m의 반원형 터널의 입구는 화강석으로, 내부는 붉은 벽돌로 마감돼 있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터널 위에는 ‘애국동산’이 조성돼 있다. 칠곡군의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비석, 한국전쟁 때 희생된 순국경찰위령비가 함께 있고 맨 꼭대기에는 ‘유엔 왜관지구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애국동산은 호국의 다리와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위치지만 바로 앞에 4차선 국도의 고가도로가 놓여 전망을 가리고 있다.


호국의 다리에서 약 2.5km 상류 언덕에는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 들어섰다. 낙동강방어전투를 재조명하는 추모와 체험, 교육, 여가 기능을 갖춘 시설이다. 중앙 로비에 구멍 난 철모와 55개의 탄피 모형으로 꾸민 장식물이 인상적이다. 4층 전망대에서는 넓은 창으로 낙동강과 맞은편 관호산성, 들판을 지나 금오산으로 뻗은 경부고속철도 선로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기념관과 칠곡보생태공원 일대에서는 11~13일 ‘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이 열린다.

구상 시인과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호국의 다리 하류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강둑 안쪽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구상(1919~2004) 시인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에서 뽑은 세계 200대 문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22년간 왜관에 머물며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문학관은 2층 건물로 1층은 전시실, 2층은 서고와 사랑방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2층 ‘보존서고’다. 구상문학관은 2012년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저자가 서명한 도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라는 인증을 받았다. 황순원, 박목월, 피천득, 유안진, 이해인, 신달자 등 당대의 문인들 서적뿐만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정계와 경제계 인사들이 직접 서명해 선물한 책 6,062권을 소장하고 있다. 보존서고는 훼손을 우려해 개방을 하지 않지만, 문학관에 요청하면 누구나 사서와 함께 들어가서 열람할 수 있다. 자신이 증정한 책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문학관을 찾는 저자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문학관 앞에는 ‘관수재(觀水齋)’라는 아담한 한옥 건물이 있다. 방 안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책상 위에 오래된 타자기가 놓여 있다. 관수재는 강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는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강(江)’ 연작시를 탄생시켰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마주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그리스도 폴의 강’ 두 작품이 마당에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문학관과 낙동강은 4차선 국도로 분리돼 있고, 하필이면 전망을 가리는 육교를 통해야만 강둑에 닿을 수 있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면 시인의 강에서 잠시 시심에 취해도 좋을 듯하다. 강변 공원에는 지금 하늘하늘하게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다. 그의 시는 읍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주한미군 기지 담장 곳곳에도 벽화와 함께 장식돼 있다.

서울에서 출생해 북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구상의 문학관이 왜관에 자리 잡은 것 역시 한국전쟁과 무관치 않다. 시인은 네 살 되던 해 성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부친(구종진)을 따라 함경남도 원산 인근의 문천군 덕원리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부를 수료한 후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해 철학적 기초를 다졌다.

독일에 기원을 둔 성베네딕도회의 덕원수도원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철수하고 1952년 왜관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시인은 이듬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이 수도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수도원은 구상문학관에서 약 1km 떨어져 있다.

수도원에는 그 이전(1928년)에 들어선 옛 성당 건물과 사제관, 현재 기념품 판매점으로 이용되는 본당 사무실 건물이 남아 있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붉은 벽돌 건물과 주변 조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 온 것처럼 분위기가 고풍스럽고 아늑하다. 신축한 성당에는 수도원의 역사를 담은 작은 전시관이 있다. 구상 시인이 유년을 보낸 덕원수도원과 ‘기도하며 일하라’는 모토대로 양봉과 목공에 전념하는 신부들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수도원에서 자체 생산하는 소시지는 여행객이 가장 많이 사가는 기념품이다.

수도원에서 약 7km 떨어진 가실성당도 교인들의 순례 코스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1923년 지어져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로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옛 성당과 꼭 닮았다. 낮은 언덕에 우뚝 솟은 종탑과 주변 들녘 풍경이 고즈넉하다.

<칠곡=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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