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좋은 심판

2019-10-0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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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차안에서 듣고 있던 ESPN 라디오의 워싱턴 내셔널스와 밀워키 브루어스 간 와일드카드 결정전 중계 도중 캐스터가 브루어스 포수 야스마니 그랜달의 ‘프레이밍(framing)’에 관해 언급한다. 야구에서 프레이밍은 포수가 투수의 공을 받을 때 좀 더 유리한 판정을 받기 위해 기술적으로 글러브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벗어나는 공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심판 눈에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눈속임이기에 기만으로 보는 시선도 있지만 포수의 프레이밍이 실점을 막고 승리에 기여하는 요소가 된다는 분석들이 나오면서 이제는 포수의 능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랜달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프레이밍을 가장 많이 하는 포수로 유명하다. 그래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얻어내기도 하지만 글러브를 잘못 놀리다 투수의 공을 뒤로 빠뜨리는 일도 그만큼 잦다.

캐스터가 “언젠가 로봇 심판이 등장하면 포수들의 프레이밍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하자 해설자는 “좋은 심판들은 지금도 프레이밍을 잘 잡아낸다”고 응수한다. 실제로 심판들은 경기 후 자신들의 판정을 복기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상습적인 프레이밍 포수로 찍히게 되면 다음 판정에서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프레이밍은 어떤 사물과 현상 등을 바라보는 시각과 틀, 그리고 관점을 뜻하는 프레임을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당연히 프레이밍은 야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레이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작동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프레이밍 효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국 춘추시대 고사이다.

원숭이를 좋아했던 송나라 저공은 날로 늘어나는 원숭이 때문에 먹이를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원숭이들이 화내지 않도록 하면서 먹이를 줄일 방법을 궁리했다. 그가 원숭이들에게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의 도토리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화를 냈다. 저공은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며 앞뒤를 살짝 바꿨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뛸 듯이 좋아했다. 하루 7개씩의 도토리는 그대로인데 제시하는 방식을 약간 비틀자 반응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고가의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손님들에게 가격을 설명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전체 금액을 앞세우기보다 하루에 얼마 꼴 혹은 한 달에 얼마 꼴이라고 나눠 제시한다. 그러면 총액은 전혀 달라지 않았음에도 손님 입장에서는 감당할만한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프레이밍이 가장 교묘하고도 치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분야가 바로 정치다. 정치세력들은 온갖 프레이밍을 동원해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인다. 대한민국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있는 ‘조국 사태’ 역시 본질적으로는 프레이밍 전쟁이다. 보수는 ‘좌파정권의 폭주’라는 프레이밍을 통해 조국 사태 이전 자신들을 코너로 몰았던 ‘친일 프레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반면 진보는 조국 낙마를 주장하는 보수를 ‘개혁 저항세력’으로 프레이밍하고 있다.

정치적 프레이밍의 목적은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다. 자기에게 유리한 구도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진영의 승리를 도모하거나 정치적 이익을 취하자는 데 있다. 어차피 정치는 프레이밍의 싸움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의 프레이밍은 비난할 것이 못된다.
다만 난무하는 교묘한 프레이밍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잘 판단하면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 하는 것은 심판의 몫이다. 상습적인 프레이밍으로 심판의 눈을 속이려 드는 플레이에는 가차 없이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 시민들, 특히 유권자들이 좋은 심판이 될 때 비로소 좋은 정치가 가능해진다.

마치 야구장의 로봇 심판이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하듯, 인공지능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진실을 판별해주는 시대가 오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의 좁은 소견과 불완전한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좋은 심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며 시민들은 보다 더 좋은 심판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을 좋은 심판으로 우뚝 세우는 것은 사실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좋은 심판인가.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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