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리스의 비극

2019-09-17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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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이 오면 말리부 해변 산중턱에 자리 잡은 게티 빌라에서는 9월 한달 동안 그리스의 고전 비극을 공연한다. 그리스로마시대의 별장을 모방해 복원한 게티 빌라에는 당시 원형극장을 본 따 지은 야외무대가 있는데, 여기서 조용한 밤하늘 아래 청명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수준 높은 연극의 정수를 즐기는 건 무척이나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이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 신전에 딸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연극을 감상했다. 신관의 주관 하에 1만7,000여명의 아테네 시민 모두가 참가하는 국가적 축제에서 봄에는 비극을, 겨울에는 희극을 공연했다.

처음에는 열광적인 춤과 합창이었다. 그러던 것이 합창대에서 한 사람이 나와 코러스와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가 많아지면서 극적 이야기를 갖춘 연극이 되었다. 점점 음악이 줄고 배우와 대사가 늘어났으며 연기를 위한 무대가 생겨났다. 그러나 비극 전체를 관통하며 잡아주는 것은 음악이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그리스 비극은 반쪽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다. 문자만이 남은 희곡에서 음악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있으며, 인간에게 일어나는 비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 야기한 것이라는 게 그리스 비극의 공통된 메시지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정해진 운명을 수행하면서 가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데 관객은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공포와 연민을 통한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를 겪는다.

여기서 나오는 질문이 그러면 어디까지가 신의 섭리이고 운명이며, 어디까지가 나의 어리석음이고 내 잘못인가 하는 것이다. 나의 주체성은 어디에 있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는가, 하는 인간 실존의 깊은 성찰을 담았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은 그대로 철학이 된다.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인 기원전 6~3세기가 탈레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하던 철학의 시대였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대그리스 인들만큼 수준 높은 집단은 없었다. 그들은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수학과 철학, 천문학, 예술, 건축에서 고도의 지적이고 세련된 문명과 문화를 누렸다. 올림픽의 기원도, 민주정치의 기원도, 서양건축의 원형(파르테논신전)도 모두 그리스다.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지동설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타코스는 지구도 하나의 행성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며, 별들은 대단히 멀리 떨어진 천체라고 주장했다. 또 에라토스테네스는 막대기 하나 가지고 해가 높이 떴을 때의 그림자 각도를 계산해 지구의 둘레가 2만5,000마일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계산해냈다.

그렇게 찬란한 학문과 예술의 자취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천년의 중세 암흑기에 사장됐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지동설이 탄생하고,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으니, 인류 진화의 수레바퀴는 무려 1,500년 이상 멈춰있었던 셈이다. 지금도 서구 문명과 미의 기준은 고대그리스이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을 만큼 정신세계도 그들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그리스를 보면 같은 그리스의 후손들인가 할 정도로 아리송할 때가 많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15세기 이후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들어서야 독립한 이 나라는 과거의 영광은 근처에도 못 가고 만성적인 디폴트와 높은 청년실업률로 신음하며 관광수입으로 먹고살고 있으니, 이게 바로 ‘그리스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한편 2006년 개관한 게티 빌라의 무대에서는 그동안 3대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 ‘아가멤논’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페르시아인들’ ‘엘렉트라’ ‘트로이 여인들’ ‘헬렌’ ‘바카이’ 등 14개 작품이 공연됐다.

올해 공연 중인 비극은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를 극작가 아론 포스너가 개작한 ‘치유’(The Heal)다. 인간이 겪는 상처와 고통, 그 치유에 대해 묻고 고뇌하고 수용하는 작품으로, 그동안 보았던 다른 비극들에 비하면 너무 무겁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극본과 연출이 돋보인다. 대사를 단순명료하게 현대화하여 내용의 이해가 쉽고, 코믹 터치를 가미한 것이 한층 분위기를 살려준다. 과감한 춤과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3명의 여성 코러스가 특히 인기였는데, 그중 한명은 아주 똘똘해 보이는 한인 2세 유니스 배다. 오는 28일까지.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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