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국 사태가 보여준 것

2019-09-1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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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소모자는 1936년부터 20년간 니카라과를 통치한 독재자였다. 소모자 정권의 악행과 부패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에 대한 지지 철회를 요청받은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소모자는 개새끼일지 모르지만 우리 개새끼”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는 나쁜 놈이지만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인물이란 뜻이다.

루즈벨트의 이 말을 고상한 언어로는 ‘진영 논리’라 한다. 같은 편이면 어떤 잘못을 해도 감싸주고 적이면 없는 잘못도 만들어내 공격한다. 조국 사태가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철저히 진영 논리에 빠져있는가 하는 점이다. 청문회에서 여당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반대한 금태섭 의원은 수만통의 비난 문자 폭탄을 받았다.

반면 386세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은 조국이 드러낸 수많은 문제점에는 침묵하면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적폐 세력으로 몰았다. 그 중에는 불과 2년 전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몰아내는데 선봉에 선 20대 청년 학생들도 있고 박근혜, 이재용, 이명박을 잡아넣은 윤석열 검찰총장도 있다.


윤총장은 두 달전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총장에 임명하면서 “우리 윤총장”이라 부르고 검찰 개혁의 최적임자라고 추켜세우던 인물이다. 살아있는 권력이라고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수사하라는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 조국 일가의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졸지에 정치 검찰, 적폐 검찰의 수괴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번 사태로 또 하나 드러난 것은 입만 열면 평등과 공정, 정의를 부르짖던 조국을 필두로 한 386세대의 위선이다. 조국 일가는 딸의 대학 입학을 위해 2주짜리 인턴을 병리학 논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총장의 허락 없이 총장상을 받은 것으로 하고, 하지 않은 자원봉사를 한 것으로 만들었다.

‘장학금은 성적보다 가정 형편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던 재산 56억의 조국 딸은 서울대 환경 대학원에서 2학기 연속 장학금을 받고 자퇴했으며 부산 의전원에서는 두 차례 유급을 하고 6학기 연속 장학금을 받았다. 이번 청문회에서 그가 한 이야기 중 가장 웃기는 것은 그 일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못하게 했을 것이고 나중에 돌려주려고 했으나 규정 때문에 못했다는 말이다.

딸 진학을 위해 그처럼 정성을 쏟은 집안에서 등록금이 어떻게 마련됐는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돌려주려 했는데 규정 때문에 못했다는데 부산 의전원은 그런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설사 그런 규정이 있다 한들 마음만 있다면 딸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면 된다. 장학금을 주겠다는데 거부하는 대학은 대한민국에 한 군데도 없다. 조국이 공정과 정의를 입으로 떠드는 대신 조용히 장학 기금을 만들어 저소득층 자녀를 도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보여준 또 하나의 진실은 한 때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던 교육이 이제는 신분 고착화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조국 딸 자소서에 등장한 스펙을 보면 부모의 연줄과 돈이 없는 집안 자녀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이 화려하다.

과거 시험만으로 당락을 정하던 입시제도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가난한 학생도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은 남겨 놓았다. 현행 제도는 이 싹을 처음부터 잘라놓고 있다. 신분의 대물림을 보장하는 현행 입시제도는 근본적으로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을 법무장관에 임명하면서 범법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명을 철회할 수 없다고 밝혔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이 분노하는 것은 조국이 범법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평등과 공정과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인물을 어떻게 개혁의 기수로 밀수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생의 74%가 조국의 법무장관 임명에 반대하며 서울대 로스쿨 학생의 84%가 그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이에 앞서 조국은 서울대생 인터넷 공간인 스누프 라이프에서 89%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장 부끄러운 동문’ 1위로 꼽힌 바 있다. 이런 학생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조국 임명을 강행한 문재인은 한국의 미래인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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