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앵커링’의 덫

2019-09-04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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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전문가들에게 집 주인이 원하는 가격을 알려준 후 그 집의 가치를 평가하도록 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주인이 원한다는 가격을 높일수록 전문가들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가격도 따라 올라간다. 주인의 호가라며 전달된 정보가 전문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후 설문에서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주인의 호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이런 확신과 달리 이들의 판단은 주어진 기준에 영향을 받았다.
‘닻 내림’을 뜻하는 이른바 ‘앵커링(anchoring)‘ 효과가 작동한 것이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현실 속에서 앵커링은 유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적당한 기준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타당하지 않은 정보가 앵커링으로 작용해 의사결정 과정을 오염시킨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무수한 정보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사례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미디어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들에 의해 대단히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앵커링은 사회 전체의 신뢰를 흔들어 버린다.


지금은 많이 진정됐지만 부동산 폭등은 지난해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최대 이슈였다.
대다수 국민들을 깊은 좌절과 상실감에 빠뜨렸던 부동산 광풍의 이면에는 ‘평당 1억원 시대’라는 기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경제전문지가 내보낸 이 기사는 다른 신문들과 방송들에 의해 검증이나 확인도 없이 마구 인용되면서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뉴스를 접한 많은 독자들과 시청자들은 빨리 아파트를 사지 않으면 영영 살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기사의 영향으로 비싼 돈 치르며 아파트 구입을 서두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아파트 값은 더 올랐다. ‘평당 1억원’이 이들의 결정에 앵커링 효과를 미친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한 시사프로그램이 ‘아파트 평당 1억원’의 실상 조사에 나섰다. 꼼꼼한 현장조사를 통해 서울에서 실제로 평당 1억원에 거래되는 지역은 없음을 확인했다. 첫 보도를 내보냈던 기자와 해당 언론사를 추궁하자 부풀린 기사였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언론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면서 부동산 전문가 행세를 하는 투기세력들이 이미 이 기사를 아파트 판매와 가격 올리기에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후였다.

가짜뉴스들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런 앵커링 효과이다. 뉴스로 포장된 가짜 정보를 대하면 많은 사람들은 “언론이 설마 거짓말 하겠어”라며 쉽게 믿어버린다. ‘언론’ ‘뉴스’ 같은 단어들의 이미지가 앵커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세력은 어차피 100% 다 걸려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열에 하나만 속아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여긴다.

요즘 대한민국은 온통 조국 논란으로 시끄럽다. 장관 후보자 한 명의 검증을 놓고 마치 국가의 명운이 달린 양, 진보와 보수 그리고 여당과 야당은 격렬한 ‘진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조국과 관련해 쏟아진 기사만 수만 건이 넘는다. 거의 광기에 가깝다.

제기된 의혹 속에는 사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혹의 진위를 떠나 조국은 이미 만신창이 죄인이 돼 버렸다. 의혹 제기 자체가 가지는 앵커링 효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청문회가 사실상 무산되자 장장 11시간에 걸쳐 기자간담회를 가졌지만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얼마나 털어냈는지는 의문이다.

일반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론재판에서도 피의자의 소명기회는 보장돼야 한다, 그럼에도 자유한국당은 애당초 이런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혹 규명’이 아닌 ‘의혹 쌓기’를 통해 앵커링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속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명한 소비자, 현명한 주권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앵커링의 덫을 식별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 뉴스와 소문의 경우 사실 관계와 전후 맥락을 잘 살피고 따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한 인간에 대한 판단 문제라면 최소한 그의 변명이라도 들은 다음 정죄하는 것이 성숙한 자세이다.

조국 사태를 보며 과연 한국사회는 이런 성숙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하기야 업소들이 일단 가격을 확 올려놓은 다음 대폭 깎아주는 척 하는 세일에 잘 속아 넘어가는 우리의 속성상 앵커링의 덫을 피해가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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