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퍼 CEO’의 씁쓸한 유산

2019-08-28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한때 세계 최고기업으로 우뚝 서며 미국 제조업의 자존심으로까지 여겨졌던 GE의 요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참담한 몰락 후 회생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GE가 최근 또 한 차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2008년 버나드 메이도프의 초대형 폰지 사기를 고발해 유명인사가 되었던 감사전문가 해리 마코폴리스가 “GE가 보험부문에서 380억 달러 규모의 회계부정을 저질렀다”고 주장한 것이다. GE는 즉각 허위주장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어느 쪽 말이 사실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GE로서는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 주장이 나온 날 GE 주가는 한때 13%가 빠지기도 했다.

GE의 추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해 다우지수에서 퇴출된 사건이었다. 시가 총액 6,000억 달러로 세계 최고기업에 오른 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현재는 1,000억 달러 정도의 기업으로 쪼그라들었다. 쌓아올리긴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란 말이 실감난다. GE는 어쩌다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GE의 몰락과 관련한 다양한 설명들 가운데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는 분석은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이른바 GE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잭 웰치에 있다는 지적이다. 성공과 몰락이 같은 뿌리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웰치가 CEO로 있던 시절 GE는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웰치에게는 ‘경영의 신’ 등 온갖 찬사가 뒤따랐다. 그는 자본주의 숭배문화의 정점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만든 경영학교에는 비싼 돈 내고 ‘신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경영자들이 줄을 섰다. 그를 다룬 책들도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금은 동네 도서관으로 갔지만 당시 내 서가에도 웰치에 관한 책이 한두 권 꽂혀 있었다.

웰치는 제조업을 벗어나 금융, 부동산, 미디어 등으로 마구 몸집을 불려갔다.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GE를 초거대 기업으로 키웠다. 점차 금융이 주력사업이 되면서 GE의 정체성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금융 등 비제조업 매출 비율이 날로 커졌다. 그 과정에서 인사고과 점수가 낮은 직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리해고가 이뤄졌다. 웰치에게는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뒤따랐다.

이런 경영방식이 당장 GE의 위기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적을 올려주고 수익을 안겨줬다. 그러면서 웰치를 향한 찬사는 더 뜨거워져갔으며 월스트릿 분석가들은 웰치 신화에 푹 빠졌다.

그러나 맛있다고 단 것을 너무 많이 먹다 보면 탈이 나는 법이다. 곧바로 후과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몸을 상하게 된다. 자신의 뿌리를 잊은 GE의 경영방식은 머잖아 직격탄을 맞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워런 버핏의 30억 달러 긴급 수혈로 간신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후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가운데 찬란하게 보였던 웰치의 실적을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점차 힘을 얻었다. 웰치의 경영성과 상당부분은 개인의 능력이 아닌 전반적인 거시경제 흐름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CEO들의 경영실적 대부분은 개인의 역량보다 경기의 흐름에 훨씬 더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경영학에서도 ‘영웅사관’은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다.

GE의 미래를 잘못된 방향으로 설계한 것에 더해 웰치가 저지른 또 하나의 실수는 후계자 선정이었다. 웰치가 고른 후계자 제프 이멜트는 무려 16년간이나 CEO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GE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고 수습하기보다 부실 감추기에 급급했다. 잭 웰치를 향한 추앙문화에 짓눌려 잘못된 길을 되돌리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수퍼 CEO’가 남긴 부정적 유산의 그림자는 크고도 길다.

기록 스포츠인 야구의 ‘명예의 전당’ 투표는 선수 은퇴 후 5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선수의 업적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웰치의 스토리는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지나치게 부풀려진 씁쓸한 신화였다. 기업 장수의 비결은 건강한 가치와 철학을 가진 합리적 경영자와 헌신적인 종업원들 외에는 없다. GE의 몰락이 던져주는 교훈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