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밍고의 추락

2019-08-20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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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클래식 음악계에 메가톤급 폭탄이 하나 떨어졌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성추행 스캔들이다. 오페라의 수퍼스타, 살아있는 전설이며 우상인 도밍고가 ‘미투’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폭탄의 위력은 순식간에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 충격파가 가장 크게 느껴진 곳이 이곳 로스앤젤레스다. 도밍고는 LA 오페라를 만든 사람이고, 스캔들의 일부도 이곳에서 일어났고, 현재도 총감독으로 있으면서 그의 이름과 파워로 오페라단을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거나 지휘하지 않는 시즌이 한 시즌도 없으니, LA 오페라가 이번 일로 받을 타격이 얼마나 클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힘들다. LA 타임스가 거의 매일 후속기사를 내보내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이유다.

10년 넘게 LA 오페라를 취재하면서 도밍고를 존경하고 사랑해온 나 역시 충격과 배신감이 무척이나 크다. 바로 지난 5월에도 그를 예찬하는 칼럼을 썼을 정도로 도밍고는 나의 영웅이었다. 기자회견에서 만나는 그는 너무나 우아하고 매력적인 젠틀맨이었고, LA 오페라에서 노래하는 한인 성악가들도 한결같이 도밍고의 지극한 후배 사랑과 인간적인 자상함을 칭찬하고 감사했다. 어쩌면 그 사랑과 자상함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쳤던 모양이다.


이 뉴스를 처음 보도한 AP통신에 의하면 여자 오페라가수 8명과 댄서 1명이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도밍고에게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자기 아파트에서 아리아를 연습하자거나 개인 레슨을 해주겠다, 배역을 주겠다는 등의 미끼로 도밍고가 반복적으로 전화하고, 드레싱 룸으로 찾아오고, 계속 따라다니며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대부분 신인 성악가였던 이 여성들은 “도밍고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신에게 ‘노’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그를 거부한 후에 공연 기회를 잃었다는 여성도 있었다.

도밍고가 젊은 여자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이야기는 오페라세계에서 오랫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여자가수들 사이에는 ‘도밍고를 조심하라’ ‘그와 절대로 단둘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널리 퍼져있었다니 9명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당했을 수도 있다.

도밍고는 성명을 통해 이같은 의혹을 애매하고 완곡하게 부인하며 변명했다. “3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에 대해 익명의 개인들로부터 제기된 주장은 당혹스럽고 부정확한 것이다… 나의 교류와 관계들이 항상 환영받았고 합의된 것이었다고 믿는다… 현재의 기준과 규범이 과거와는 매우 다른 것을 알고 있다…”

이 변명은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하다. 이런 경우 한마디로 사과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고 현명할 것이다. 벌써 음악인들뿐 아니라 그의 팬들까지도 펄쩍 뛰고 있다. 자신과의 관계가 ‘환영받고 합의된 것으로 믿는다’니, 거부할 수 없는 위치의 여성들을 골라서 저지른 일 아닌가. 또 ‘현재의 기준과 규범이 과거와는 매우 다르다’는 부분은 과거에는 성희롱이 괜찮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30년 전에도 성희롱은 괜찮지 않았다.

핵폭탄 급 미투 운동의 시작이 대부분 공연예술분야에서 촉발됐다는 사실은 애처롭고 비극적이다. 2017년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한 여배우들, 한국 연극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여배우들, 그리고 이제 오페라 가수들이다.

연극, 영화, 음악, 춤, 심지어 체육계에는 모두 무대에 한번 서기만을 갈망하는 신인들이 넘쳐난다. 아주 특출나지 않은 이상 실력이 고만고만해서 키재기를 하는 신인들은 유력자의 작은 도움만 있어도 쉽게 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다. 게다가 이들이 일하는 환경은 분장실, 리허설 스튜디오, 연습실 등 무대 뒤의 좁고 막힌 공간이다. 이런 약점을 가진 어린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폭행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사람은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라 해도 용납될 수 없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9월과 10월로 예정됐던 도밍고의 공연을 취소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올 가을 ‘맥베스’와 ‘나비부인’에 그의 출연이 예정돼있는데, LA 오페라의 조사 결과를 보고 철회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LA 오페라는 외부 자문위를 고용해 이 문제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400년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로 꼽히는 거인이다. 60년 커리어를 통해 150개 넘는 역할을 노래했고 4,000회 넘게 공연한 그의 기록은 앞으로 깨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런 신화적 업적을 가진 사람이 한 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프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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