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전장’ 위의 우리들

2019-08-07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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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가 지난 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면서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과 국제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면서도 도발을 일으킨 아베의 의도는 뻔하다. 자신의 야심인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위한 개헌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외부의 위협세력으로 한국을 설정하고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아베정부의 도발로 한국경제는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당분간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한국 국민들의 반응은 의연하다. 정부와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합심해 난국을 헤쳐 나겠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현 상황은 역사적 진실과 피해자들의 상처를 외면한 채 한일 간의 과거사를 서둘러 봉합한 무책임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언젠가는 한번 터져야만 했던 일이 이번에 터진 것이다.

지금 한일 두 나라는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얼마 전부터 또 다른 전선에서 한국을 겨냥한 ‘역사전쟁’을 벌여오고 있다. 그 전쟁터는 바로 이곳 미국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주전장’이 상영되고 있다. 이 다큐 영화를 연출한 사람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 감독이다. 영화는 일본 우익인사 30여명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일본은 절대적으로 선한 나라이며 아시아를 침략한 게 아니라 보호한 것”이라는 등 영화 속 인사들의 어처구니없는 궤변과 한국 조롱 발언을 듣고 있자면 분노를 넘어 역겨울 정도다.

영화제목 ‘주전장’은 한자로 ‘主戰場’ 영어로는 ‘The Main Battleground’이다. ‘가장 중요한 전쟁터’라는 뜻이다. 이 어휘는 일본 우익들이 미국을 지칭하며 사용하는 말이다. 일본 극우들은 미국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돌려놓으면 세계여론을 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 표현 하나에서도 미국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경외심이 읽힌다.

2007년 연방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이 추진되고 2010년 뉴저지 첫 위안부 희생자 추모기림비와 2013년 글렌데일 첫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될 때 일본은 로비와 소송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2015년 정부 예산안에 전년도보다 무려 3배가 늘어난 5억 달러를 국가홍보 예산으로 책정하고 그들이 ‘주전장’으로 여기는 미국 내 대학교들과 연구소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돈 풀기’에 나섰다.

우익 아베정권이 과거사 문제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소녀상 건립과 관련해 2017년 연방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소녀상 철거를 ‘핵심적 국가이익’이라고 표현한데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거의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일본의 의도가 미국 여론 주도층에 상당히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뤄오고 있는 가주한미포럼의 김현정 대표는 “일본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해 홍보전문가들과 로비스트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퍼뜨린다”며 “분명한 역사적 범죄를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외교적 마찰 혹은 민족적 감정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비판한다. 이번에도 자신들의 경제도발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로비와 여론전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이 미국을 ‘주전장’으로 설정하고 조직적인 싸움을 걸어오고 있는 만큼 제대로 상대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같은 규모로 맞대응하기엔 한국정부의 준비와 전략이 크게 부족하다. ‘경제전쟁’에 맞서느라 미국전선에 신경 쓸 여력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항상 그래왔듯 이번에도 한인사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또 한번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왔다. 마침 LA 한인회 등 22개 한인단체들이 일본 도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연방의회의 중재를 촉구하는 대대적인 청원 서명운동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논리를 바탕으로 정치인은 물론 미디어를 상대로 한 전방위적 캠페인에 나서야 한다. 무기와 실탄이 부족해 돌과 죽창으로 맞서야 할 상황이지만 일단 정의로운 분노와 결집된 힘이면 충분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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