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종은 없다

2019-08-06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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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미국이 이 지경이 됐느냐고 한탄하는 소리를 주말 내내 들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와 차별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단지 싫다는 이유만으로 총기를 무차별 난사하는 극렬 증오범죄가 바로 최근에 유행이 돼버렸으니,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할까?

인간 게놈(genome)은 한사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DNA 염기서열을 말한다. 이 게놈을 해독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분석하기 위해 1990년 전세계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인도, 중국이 함께 한 이 국제작업은 사람의 유전자 약 2만개에 기록된 30억쌍의 염기서열을 모두 밝혀내는 쾌거를 거두고 2003년 공식 완료되었다.

그 결과 엄청난 유전정보를 갖게 된 과학자들은 이를 활용해 난치병의 예방과 진단, 신약개발 등 의학과 과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왔다. 또한 특정 개체의 게놈은 고유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DNA 분석검사법이 확립되어 미제 범죄사건이 해결되기도 하고, 친자 확인이나 입양인 가족 찾기 등 대중적으로도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밝혀낸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시안,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은 유전자 수가 동일하다는 것, 외모와 피부색이 달라도 모든 인종은 똑같은 지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을 가진 사피엔스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종’(species)과 달리 ‘인종’(race)은 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생물학에서 종을 나누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서로 교미해서 번식능력이 있는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같은 종이다.

DNA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순수 백인 혈통을 확인해 보이려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얼마나 뜻밖의 결과를 받아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들의 3분의 2가 다른 인종,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의 혈통이 섞여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DNA 분석을 의뢰한 다른 미국인들도 대부분 여러 인종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종차별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만일 이 테스트를 받는다면 그는 아마 결과를 세금보고 만큼이나 꽁꽁 감추고 공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주로부터의 귀환’은 일본작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12명의 우주비행사를 심층 인터뷰하여 쓴 책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밖을 떠나본 특이한 체험을 가진 이들의 내적 변화를 기술한 이 책에서 우주비행사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암흑의 우주공간에서 청색과 백색으로 빛나는 지구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 아름다운 지구 안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증오와 반목이 얼마나 슬프고 어리석은 일인가에 관한 탄식이다. 1980년대 초에 인터뷰한 내용인데 마치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증언을 좀 들어보자.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나라들이 전 세계의 불행한 모든 사람들을 구하고도 남을 거액의 자금을 들여 서로 살육할 준비를 거듭하고 있는 현상은 슬픈 사실이다. 인간은 모두 같은 지구인이다. 나라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도 모두 같은 지구인이다.”(제임스 어윈, 아폴로 15호)

“우주에서 보면 국경 따위는 없다. 인간이 정치적 이유로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우주에서 자연 그대로의 지구를 바라보면 국경이란 게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지 잘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립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죽인다. 이건 슬프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리 싸워도, 누구도 이 지구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월터 쉬라, 아폴로 7호)

“지구상의 나라마다 풍토가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인종과 민족, 문화, 음식까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은 우주에서 보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차이이다. 우주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고 본질만 보인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종족이 달라도 같은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는 것이다.”(돈 아이즐리, 아폴로 7호)

“너무나 아름다운 지구를 보고 있으면 내가 지구의 일원이라는, 지구에의 귀속의식이 아주 강렬하게 살아났다. 나는 미국 국민이라든가, 텍사스 사람이라든가, 휴스턴 시민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지구에의 귀속 의식뿐이었다.”(폴 와이츠, 스카이랩 2호)

그러면서 이들은 적대 관계 나라들의 원수들이 우주에 나와본다면 당장 싸움을 그만 두고 화해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누가 좀 트럼프를 로켓에 실어 우주로 쏘아 보내버렸으면 정말 좋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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