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달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연설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경제는 글로벌 평화와 번영의 근간”이라며 자유무역의 가치를 소리 높여 강조했다. 그리고는 불과 이틀 후 자신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으며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보다 더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국가지도자의 모습을 최근 본 기억이 없다. 뉴욕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아베가 자유무역에 타격을 가한 가장 최근의 세계 지도자가 됐다”고 비판한 것은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너무나도 황당하고 뻔뻔한 입장 바꾸기에 할 말을 잃게 되지만 차분히 되짚어보면 이런 이중성은 일본정부가 아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견지해온 기본태도임을 깨달을 수 있다. 아베는 집권 초기만 해도 지금처럼 ‘막가파’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사회가 우클릭을 계속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극우화 폭주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는 원칙과 상식보다는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미소를 짓기도 하고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이중성이 아베 개인과 현 일본 집권세력뿐 아니라 일본사회 전체에 뿌리 깊은 의식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베의 선동과 궤변에 호응하고 장단을 맞춰주는 유권자들이 없다면 이런 도발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언론들 또한 이런 의식과 패턴에서 비껴나 있지 않다.
일본인들에 대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른바 ‘혼네’(속마음)과 ‘다테마에’(인사치레)가 그것이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이런 이중성이 어떻게 형성 됐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정국이 어수선하고 불안하던 봉건사회를 오래 거치면서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처세가 의식으로 내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연유야 어찌됐든 일본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 신뢰했다가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베는 세계 정상들 앞에서 아름다운 수사로 자유주의 무역을 예찬한 후 곧바로 돌아서서 보호주의의 칼을 빼들었다. 그가 보인 이중적 행태는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비열하기 짝이 없다. 일본과 벌이고 있는 외교전과 세계무역기구 제소의 성패는 이런 점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중성은 기회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이 보여준 태도가 바로 그랬다. 일본군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 싸우다 포로로 잡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협조적으로 변했다. 죽창을 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반국민들 역시 일왕의 항복방송을 듣자마자 열렬한 미군 환영인파로 돌변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런 일본인들을 연구한 후 “그들의 기본적인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기회주의자들은 자기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 비굴해진다. 시류에 따라 끊임없이 얼굴을 바꾼다. 트럼프 앞에서 유순하게 굴며 눈치를 보던 아베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이런 기회주의자들을 제압하는 건 원칙주의자를 굴복시키기보다 쉽다. 강한 힘을 키우고 이를 보여주면 된다. 일본의 기회주의라는 변수를 한국의 힘이라는 상수로 제어해야 한다.
일본의 도발이 시작된 후 한국에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론’이 거세지고 있다. 주요 산업의 핵심소재와 부품, 그리고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일본으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또 다른 독립에의 열망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외교와 협상을 통해 현 사태가 수습된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겼다 싶으면 언제든 똑같은 도발을 반복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회주의 DNA는 언제든 발현될 수 있다. 그러니 ‘제2의 독립선언’론이 지나가는 각성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의 명운을 떠올리며 힘을 합해 가열차게 추진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일부 세력이 “죽어도 일본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며 퍼뜨리고 있는 체념론은 일제가 그토록 한국민들 머릿속에 주입하려 했던 식민사관의 잔재일 뿐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지금의 한일관계보다 더 잘 들어맞는 상황은 없을 것 같다.
<
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