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래의 춤

2019-07-16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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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안무하는 춤은 어떨까? 드론의 알고리듬이 창작한 춤은? DNA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따라 움직인다면 어떤 춤이 나올까?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춤에 결합하는 안무가가 있다. 영국 로열발레의 레지던트 안무가이며, 자신의 이름을 딴 현대무용단을 가진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가 그 사람이다. 현대 무용계에서 어떤 안무가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한 맥그리거는 과학적으로 인체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우리 눈에 전통적으로 익숙한 춤의 언어에서 벗어나 대단히 낯설고 실험적인 동작들로 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안무하는 춤을 보는 것은 현대음악을 듣는 것처럼,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것처럼, 현대 시를 읽는 것처럼 난해하지만 그 안에 내재한 인간 본연의 외침이 우리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가장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맥그리거는 안무하는 작업 자체가 특이하고 흥미로워서 영국에서는 그가 댄서들을 데리고 안무하는 과정을 TV 쇼로 만들거나, 청중 앞에서 실시간 창작 안무하는 무대공연을 기획하기도 한다. 입으로 계속 박자를 치면서 속사포같이 빠른 언어로 댄서들을 붙잡고 한 동작 한 동작 고치며 이어나가는 그의 안무 작업은 마치 조각가가 끌과 정을 들고 석재 한 부분 한 부분을 다듬어가는 창조과정과도 같다.

지난 주말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웨인 맥그리거 작품의 공연이 있었다. ‘아데스와 맥그리거: 댄스 콜래보레이션’이란 제목으로 현대작곡가 토마스 아데스(Thomas Ades)의 음악으로 만든 맥그리거의 3개 작품을 초연하는 무대였다. 이 가운데 2개는 LA 필하모닉이 100주년을 맞아 위촉한 작품으로, 이날 아데스가 직접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일라 조세포비츠와 피아니스트 키릴 거슈타인이 협연했으니 현대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황홀한 무대였다.

이 가운데 맥그리거가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창작한 춤이 있었다. ‘리빙 아카이브: AI 퍼포먼스 실험’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척 보기에도 사람이 혼자 안무할 수 없는 수많은 특이한 동작들이 무용수마다 뒤얽혀 30분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춤이었다. 인간이 저런 동작과 포즈를 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마디마디 분절되는 춤의 연속이었는데 ‘컴퍼니 웨인 맥그리거’ 단원들은 몸을 실리콘 젤리처럼 마음대로 부리며 완벽하게 절제된 기량을 보여주었다.

맥그리거는 AI 안무 시스템을 만드는 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스마트폰에서 문자 텍스팅을 할 때 예측된 다음 단어가 미리 스크린에 뜨는 것에 착안, 이 테크놀로지를 AI에 적용하면 춤 동작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구글 엔지니어들과 협업하여 AI에게 ‘리빙 아카이브’라는 알고리듬을 훈련시켰다. 이 아카이브는 맥그리거가 25년동안 안무한 작품들을 찍은 수천시간 분량의 동영상 자료들로, 이를 AI가 전부 습득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맥그리거의 안무 어휘를 다 익히고 이해한 AI는 그의 스타일에 맞는 범위에서 다음 연속될 동작, 이제껏 나온 적이 없는 형태의 새로운 안무를 계속 개발해냈다. 또한 각 댄서의 솔로를 캡처하여 개인의 몸놀림 형태를 감지한 다음 각 댄서에게 맞는 다음번 동작을 제안하는 식으로 안무에 참여했다. 한계에 부딪친 무용가들에게는 돌파구가 되어줄 테크놀로지가 개발된 것이다.

맥그리거는 오래전부터 이런 ‘과학적인 춤’ 작업을 해왔다.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협업한 작품(‘Entity’)을 발표하는가 하면, 자신의 유전자 코드 23개의 염기서열을 따라 안무한 작품(‘Autobiography’)을 만들기도 하고, 알고리듬이 프로그램 된 드론과 함께 안무하는 등 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AI 안무에서도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뻔하지 않은 동작, 특이하고 놀라운 동작, 몸의 반란이라고 해도 좋을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찾는 것이다.

현대음악과 현대미술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이날 공연에서도 ‘AI 퍼포먼스 실험’보다는 대작 ‘단테 프로젝트 지옥편’이 훨씬 큰 호응을 얻었다. 로열발레단을 위해 보다 율동적이고 발레적이며 드라마틱하게 안무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이 아름다움을 넘어서 이전에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때 웨인 맥그리거는 미래의 춤 그 최전방에 선 예술가다. 아니 미래의 춤이 아니라 콘템포러리 댄스, 오늘의 이야기라 해야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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