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씨는 2002년 3월21일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이 능력 오케스트라(This Ability Orchestra)’를 창단해 남가주 유일의 발육장애인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그는 이날 한 살 된 딸이 발육장애라는 판정을 받았다. 딸 윤주는 자폐와 뇌성마비 등을 가진 복합중증 장애인으로 이제 18살이 됐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엄마, “아빠-”는 2살 때 딱 한번 했다고 한다.
이 딸로 인해 그의 인생 항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정치학 교수가 목표였던 그는 생각지도 않았던 음악으로 전공을 바꿨다. 3살 반이 되도록 펴지지 않았던 윤주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앞에서 처음 펴지는 ‘기적’을 봤기 때문이다.
‘나의 길’과 ‘아이를 위한 길’ 사이에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딸을 위해 정치학과 조교로 일하던 여자대학에서 음악치료를 공부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는 음악치료가 유행이어서 대학원 과정 10명을 선발하는데 1,000여 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음악 실기도 봐야하는 바늘구멍을 뚫은 그는 얼마 뒤 딸을 데리고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콜로라도 시골마을의 한 대학에서 음악치료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말에는 잔잔한 울먹임이 깔렸다. 유모차에 딸을 태우고 강의실로 향하기도 했던 그에게 교수와 동료 학생, 이웃들이 내밀었던 속 깊은 배려는 미국, 미국인이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녀가 발육장애라는 통보를 받은 부모는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과 같은 심리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강한 부정에 이어 분노, 절망, 우울… 피하고 싶은 오래고 힘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녀가 스무 살, 서른 살이 돼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도 있다. 자녀는 뒷방에 남겨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이도 있다. 포기와 좌절만 남게 된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것이 박현주 씨의 경험이다. 11살부터 33살까지의 발육장애인 17명이 그보다 더 많은 교사와 자원봉사자, 부모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이 능력 오케스트라’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단원들은 처음에 바이올린 활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활을 100번 떨어트리면 100번 다 집어 주고, 던져 버리면 그들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2개면 되는 바이올린과 첼로 악보가 8개. 활만 그을 수 있거나 운지만 할 수 있는 등 단원들의 능력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의 한 발육장애인 단체가 와서 공연할 때 찬조 출연한 ‘이 능력-’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고향의 봄’이나 ‘어머니 은혜’ 등의 화음 뒤에는 오랜 인내와 헌신이 숨어 있었다.
“하면 되는구나, 숨겨져 있던 능력이 계발되면 이 아이들도 소통하게 되고, 사회와도 연계될 수 있게 되는 구나.” 그만큼 그들의 생이 풍요로워진 것을 지켜보는 것은 ‘이 능력-’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에게 큰 보람이다.
고비 때 마다 ‘우연 같은 보이지 않는 격려’를 경험하게 되면서 박현주 씨는 다시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필연처럼 지금은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이의 눈에서 감정과 필요를 읽어 내고, 순수한 영혼을 보게 된다는 그의 많은 이야기를 전하기에는 지면이 한정돼 있다. 남편이 서울의 한 일간지 기자이기도 한 박현주 씨에게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 경험을 나눠 줄 것을 부탁했다.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기를 바라는 것이 소망인 부모가 그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중 하나인 자폐만 하더라도 2018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 59명 중 한 명. 지난 2000년 150명 중 한 명이던 것에 비하면 급증하고 있다. 발달장애가 남의 식구 일만이 아닌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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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